살아있는 신앙
*** 살아있는 신앙 / 누가복음 14:25-27, 33-35
누가복음 14:25-27, 33-35,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 사람들은 때때로 무기력해지거나 살아야 할 의미가 희미해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에 이런 생각이 듭니까? 저는 나 자신의 존재감이 없을 때에 산다는 것이 의미 없고 무기력해집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남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은 32세에 왕위에 올라서 팔 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죽였으며, 위협이 되는 세력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미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했습니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 많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는데 그의 삶에 붙은 꼬리표가 비참합니다. 역대하 21:20절입니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정말 비참하지요? 아끼는 사람 없이 죽었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왕으로 대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에 대한 꼬리표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4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던 사람!’ 정말 비참한 인생이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은 자신이 죽었을 때 붙는 꼬리표가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려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향취를 발산하는 살아 있는 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이런 행동하는 신앙의 삶이 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3:1절을 봅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 말씀은 ‘사데 교회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는 믿음을 나타내는 행위가 없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본문 34-35절에서는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한 말씀인데 이 말씀도 역시 많이 가르쳐지고 설교되는 부분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한 가르치셨습니다. 즉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26-27절에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셨고, 28-32절에는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하고 잘 계산해야 한다.’고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는 두 가지인데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와 ‘싸우러 가는 왕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일을 벌이기 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를 먼저 계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를 가진 두 비유라는 뜻으로 ‘쌍둥이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33-35절에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존재감이 없는 즉 쓸모없는 사람으로 버려진다.’고 하십니다.
※ 살아 있는 신앙은 존재감이 분명합니다.
짠물인 바다 속의 생물들은 몸이 짤까요? 여러분이 바다 생선의 회를 먹을 때에 맛이 짜던가요? 바닷물은 분명히 짠데도 불구하고 생선은 짠 맛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생선 특유의 상큼한 맛이 납니다. 그런데 죽은 생선에 간을 하기 위하여 소금을 뿌리면 생선은 짜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짠 바닷물에서 사는 생선이 짜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다 생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짠물을 먹고 살지만 하나님께서 짠 맛을 걸러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짠 맛을 걸러내는 능력도 사라져서 결국 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악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어두움이 배어들지 않는 것은 영의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상큼한 사랑이 세상을 밝힙니다. 그러나 만일 영이 죽는다면 고스란히 죄의 어두움이 배어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두움이 배이게 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자세를 잃은 사람에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자신이 버림 받을 만큼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부부가 병원의 정신과를 찾아와서 의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남편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의가 좋았습니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다가 저에게 대드는 아내에게 화가 나서 무심코 던진 말 때문입니다. 제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너 같은 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사람들로부터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라는 대우를 받게 된다면 살아갈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라고 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죽을 맛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짠 맛이 나지 않는 소금은 흙으로도 사용할 수 없고, 건축자재로도 사용할 수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나누고, 돕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와 인내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야 합니다. 영이 살아 있고 주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풍성한 생명력이 있으면 이 맛이 새록새록 넘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시며, 골로새서 3:8-10절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가 뜸해지고 영의 생명이 빛을 잃어 가면 그리스도인의 맛도 잃어갑니다. 죽어가는 바다 생물은 짠물이 배이듯이 영의 생명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죄의 맛과 어두움이 배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을 잃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고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내는 존재감이 분명한 살아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범죄자를 징벌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5:11-13절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재감이 확실하면 자손들까지 복을 받게 됩니다.
※ 살아 있는 신앙은 선명한 분별력이 있습니다.
생명이 꺼진 육체의 특징은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의 생명이 없거나 희미한 사람은 영적인 감각 즉 분별력이 없거나 희미해 집니다. 고린도전서 2:13-1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영이 죽어 있으면 영적인 분별력은 없습니다. 영이 희미하게 꺼져 가면 영적인 분별력도 희미하여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희랍 신화 중에 ‘황금 손’, 즉 마이다스 왕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이 왕은 어느 날 낯선 신(神)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 신은 왕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왕은 “내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이 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라. 그리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고 했지만 마이다스 왕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테니 그 능력을 주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이다스 왕이 황금을 만들던 그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다 황금으로 변합니다. 하루 종일 그는 황금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는 황혼녘에 마이다스가 부르짖었던 그 절규를 잊지 마십시오.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황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해가 지는 그 황혼녘에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사랑하는 딸도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황금으로 변합니다. 목이 말라 물 컵을 만지는 순간 컵도 물도 황금으로 변합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손만 닿아도 모두 황금으로 변합니다. 이제 그의 소원대로, 그의 꿈대로, 그의 이상대로 모든 세계가 황금이 되었지만 그 황금의 한복판에서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르짖습니다.
“내가 원한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나의 딸 메리의 생명을 돌려주십시오. 내가 원한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한 모금의 물입니다. 내가 원한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지나간 시절 친구들과의 우정입니다.”
결국 마이다스 왕은 왕위와 재산과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하고 겨우 햄버거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 마이다스의 욕망과 그 욕망의 끝인 절망의 부르짖음 속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6:9-10절에서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람들은 이 세상 물질에 미치고 있습니다. 요즈음 돈 때문에 일어나는 인간이하의 일들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리스도인들마저 돈과 세상적인 소유에 미쳐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생명인지를 가늠하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신앙은 이 모든 현상을 선명하게 분별하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잡고 싶다면 세상의 것을 놓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미워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을 좋아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멀어집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고 머뭇거리는 동안에 영원한 생명의 기회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자존감과 선명한 분별력으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어 예수님의 제자 된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