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필요한 새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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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8-04 14:03
*** 이 시대에 필요한 새 사람 / 에베소서 4:17-24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먼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잠깐 조명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2013년에 젊은이들이 원하는 직업 10가지는 2004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직업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며, 아직 개발되지도 않은 기술을 사용할 것입니다. 지금은 문제라고 생각되지도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아야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문명사대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고령화세대, 베이비부머세대, 엑스세대, 밀레니엄세대(M세대, mobile generation) 이렇게 사대입니다. 고령화세대는 65세 이후 세대이며, 베이비부머세대는 6.25전쟁이 끝난 54년 이후부터 65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인데, 전후에 한꺼번에 결혼하여 급속도로 숫자가 많아진 세대입니다. 엑스세대는 1990년 중반에 신세대를 이룬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형성한 세대이며, 밀레니엄세대는 1980년대 초반 이후 출생자로 베이비부머세대가 낳았다고 해서 ‘에코세대’라고도 합니다. 어떻던 현재 인터넷 사용자는 24억명 이상이며, 일일 사용자가 760만, 월사용자는 2억2천 5백만 명이며, 1분 만에 유튜브에 업로드 되는 동영상의 길이는 24시간분량입니다. 지금은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 sns등의 사회연결망), 위치기반 서비스, 모바일, 비쥬얼데이터(visual date, 영상자료)의 시대입니다. 하루에 4천 권의 책이 새로 출간되는데 이는 18세기의 보통 사람이 평생 동안 읽는 글보다 더 많은 양입니다. 한 해 동안 새롭게 생성되는 정보의 양은 인류문명 5천년 동안 생성된 정보보다 많은 양입니다. 지금의 기술 정보가 두 배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2년입니다. 다니엘 12:4절입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예언의 말씀들이 밝혀질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역사에서도 역시 마지막 때가 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지식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시대입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연히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야만 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세상의 법칙대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며, 자기생존을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정말 중요한 삶의 여유도 잃고, 따뜻한 감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것은 이 육신적인 세상의 빠른 변화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뜻 있는 신학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지금의 교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이 짧아지면서 흥미와 축복과 윤리적인 내용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기도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이 빠른 변화를 주도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고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하는 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가는 영적인 새 사람입니다.
※ 왜 이 시대가 새 사람을 필요로 합니까?
김장을 담기 위하여 배추나 무를 소금에 절일 때에, 무작정 오래 절이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깨끗한 물로 소금기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기에 부적합하게 되겠지요. 매실을 설탕에 절일 때에도 적당한 기간이 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숙성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시기를 넘기면 신맛이 나와서 적당한 매실차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된장도 적당한 시기가 있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면 된장과 간장을 분리해야 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썩어버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적당한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가 지나면 변화해야 합니다. 곤충이나 파충류 중에는 껍질을 벗는 종류들이 있습니다. 애벌레나 유충기 때부터 점점 성장하면서 작아진 껍질을 벗어버리고 탈피나 우화를 하게 됩니다. 만일 작고 낡아진 껍질을 벗고 탈피나 우화를 해야 할 시기를 놓치면 성장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변화나 개혁은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들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대원군의 부패, 민비의 간교함, 백성들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와그너’교수는 그 이유를 한마디로 “관료나 국민 모두, 외부의 변화를 읽지 못해서 개혁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화’가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5:36-39절을 봅시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변화의 필요성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새 옷은 신축성이 좋고, 새 포도주는 발효 중이어서 팽창을 하게 됩니다.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신축성을 잃고 경직되어 있어서 신축성이 좋고 팽창하는 새 옷이나 새 포도주를 만나면 찢어지거나 터져버립니다. 즉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관점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낡은 옛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가 극도로 타락하고 변질된 것은 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기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부터 교회는 박해의 시기를 마감하고 태평성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무가 되어 성도들은 평안함에 안주하면서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변절자나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단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가 변질되고 사회와 나라가 부패했습니다. 세계적인 종교개혁을 필요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이런 중대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에 정신을 빼앗긴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감정과 감각을 중요시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배는 당연히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감각을 일깨우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진리이며 생명이심을 말하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적인 옛 사상과 관점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본문 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교회가 다시 세상적인 허물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가치관의 중심을 삼고 모든 관심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변화는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으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런 일을 행할 영적 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바로 지금의 우리들입니다. 부패한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탄식하실 때에 선지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 시대의 이사야가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인 ‘간하베’ 선교사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창녀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창녀들을 전도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주고 바른 길로 교도하는 방법이며, 둘째는 그들의 영을 주님께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방법으로 전도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창녀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간하베 선교사는 창녀촌에 가서 그녀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낮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그녀들은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여기저기서 모여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창녀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선교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일단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기는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창녀 생활을 합리화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하베 선교사가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열 명의 창녀 중 여덟 명은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그날로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가정부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숨어서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변화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을 바꾸고, 일을 바꾸고, 바른 삶을 가르쳐도 근본적으로는 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외적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영이 새롭게 되어야 삶이 새롭게 변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말하면 ‘재창조’입니다. 즉 ‘거듭남(born again)’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새롭게 변화 되고, 또 다른 사람을 거듭나도록 돕는’그런 사람입니다. 이 일을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절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복음이 전수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아 새 사람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그들이 재창조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박윤선 목사님이 신학교 채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평생 성경만을 생각했습니다. 자면서도 성경을 생각했고, 생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기록하곤 했습니다. 자식들 얼굴 색깔이 변해가는 모습도 모른 채 오로지 성경만을 위해 일생을 사노라 했지만, 그러나 큰일을 해내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개혁이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를 따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생은 일생동안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나 자신과 나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앞서 읽었던 누가복음 5:39절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는 말씀은 ‘옛 생활 습관에 빠져 있으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기득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자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탈피나 우화를 해야 할 시기에 하지 못하면 죽게 되듯이, 그리스도인이 영의 새 사람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에 변화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 19절의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허망한 육신적 감각에서 돌아서서 영의 감각을 따라가야 합니다. 가치관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며, 삶의 우선권을 영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온 세계가 뒤숭숭하면서 무엇인가 두려운 큰 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자신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의 새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