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행복을 부르는 행동언어, 감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327회 작성일 2015-07-07 15:03

*** 행복을 부르는 행동언어, 감사 / 누가복음 17:11-19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힘들여 일하고 돈을 벌고, 자식을 양육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는 가끔 ‘극한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습니다. 까마득한 고공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 - 고층건물, 교량작업, 고압철탑, 풍력발전기 공사, 송전탑 공사, 중국의 1400M 절벽에 길을 내는 잔도공(棧道工) / 거친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 - 머구리, 어부들, 해저 케이블 공사 / 뜨거운 열기와 싸우는 사람들 - 제철소, 유리공장 / 거대한 바위와 싸우는 석공들 등등. 기자들이 그 극한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에 한결같이 대답하는 말은 ‘힘은 들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즉 가족의 행복을 생각하면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하여 힘들고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다 더 확실한 행복과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하여 신을 의지하는 종교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소유한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듯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들이 사람의 행복을 줄 수도 없고 좌우할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8:5-6절입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참된 행복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명기 10:12-1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 중의 팔복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뜻도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3절을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십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makarios 라고 하며, 영어로는 blesse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단어는 ‘최고의 축복’을 의미하며, ‘행복한’ 또는 ‘행운의’라는 뜻입니다. 원어대로 번역하면 “영혼이 궁핍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팔복의 말씀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관심이 되는 ‘사람의 행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이 감사절에 생각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사건 중의 하나인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여행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실 때였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 지역을 지날 때에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기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 때니 그동안 예수님의 행적을 들어서 잘 아는 나병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 몸이 깨끗하게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검사를 받고 자유를 얻으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나병이나 유출병처럼 부정한 병을 검사하여 격리시키는 일이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여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이 있는 마을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출발할 당시에는 나병이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보니 자신의 몸이 나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은 꿈같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운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행복감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제사장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최소한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께 감사의 표현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예수님은 아직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을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합니다.’라며 절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방인 한 사람 뿐임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그 이방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방인 나병환자가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육신의 불치병도 고침 받았고, 자신의 영의 생명도 얻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런 행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습니다.

※ 행복을 부르는 행동언어가 있습니다.

요즈음 ‘복불복’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행복을 부르는 것이나 불행을 부르는 것이 모두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20절에서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시며, 오바댜 1:1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6: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행복도 저주도 받게 된다는 ‘신앙적 복불복’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행복을 부르기도 하고 불행을 부르기도 하는 사람의 행동언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말 한 마디, 때에 알맞은 말, 이것은 야구로 말하면 타점을 내는 즉시타입니다. 잠언에서도 25:11절에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했습니다. 때에 알맞은 말이 그만큼 보배롭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복을 부르는 언어가 있듯이 우리의 행동도 행복을 부르는 행동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에서처럼 모든 행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행동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랍비가 당나귀에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닭은 지금의 자명종 역할을 위하여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는 저물어 가는데 가도가도 인가가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길 옆 평평한 곳을 찾아서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 묶었습니다. 랍비가 천막 속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잔대가 넘어지면서 그만 불이 꺼졌습니다. 할 수 없이 랍비는 성경을 덮고는 기도 하고 잤습니다. 
새벽녘에 잠을 깼는데 닭이 울지를 않습니다. 천막 밖으로 나가보니 당나귀도 닭도 보이지를 않고 핏자국만 있는 것으로 보아 밤사이 맹수들에게 잡혀간 것이었습니다. 랍비는 찢어진 천막을 챙긴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지난밤에 강도떼가 이마을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온통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랍비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만일 등불이 켜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내었다면 자기도 틀림없이 모두 빼앗기고 죽었을 터인데. 이 세 가지를 미리 잃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 속의 랍비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것 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행동언어입니다. 성경말씀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말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본문말씀에서도 ‘감사’가 주제입니다. 똑같은 은혜를 받은 열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감사’했던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일반 세상 사람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감사’라는 행동언어를 많이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면, 그의 서신 속에는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최고의 행동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50:14-15절을 봅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리고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러분의 생활이 감사의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며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했던 그 이방인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육신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의 생명까지도 얻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합니다.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제 잡고’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영과 육신의 온 삶에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이방인 나병환자가 했던 일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알고 즉시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던 것뿐입니다. 돈 드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나은 것을 깨닫는 순간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자주 관심을 가져 봅니까?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내가 하나님께 관심을 두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멀리하십니다. 내가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창고를 활짝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고 하십니다.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함’을 말하며 동시에 ‘관심과 맑은 정신으로 기도해야 함’을 뜻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행동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줄인 기도도 역시 감사하는 마음이 기본요소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감사함으로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힘들고 어려울 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을 부를 때에 돌아보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침 받은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면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주님이 이루시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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