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풍성한 삶을 위해 오신 예수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788회 작성일 2015-12-21 21:29

*** 풍성한 삶을 위해 오신 예수님 / 요한복음 10:7-10


요한복음 10:7-10,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삶 속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도움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지금도 도시의 밤거리는 화려한 성탄 장식들이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무엇인지 모를 들뜬 마음이 됩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거의 종일 캐럴이나 성탄에 대한 노래들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들도 크리스마스는 있는데 예수님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 곳이 허다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첫 번 성탄절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9-11절에서 말씀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400년이나 되는 긴 영적 암흑기를 지내오면서 영이 메마를 대로 말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며 행복이신 메시아가 오셨지만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즉 구원자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로마를 몰아내고 독립국을 세우는 힘 있는 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곳, 이름이 나는 자리, 이익이 되고 보장되는 것만을 원합니다. 명품 옷과 신발, 가방으로 치장하고,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과 친구가 되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고 본문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 되고 자녀 된 우리는 성탄절이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여러모로 많이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셔야 할 사역을 ‘선한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10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즉 죄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영의 생명이 더욱 풍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길, 생명을 얻는 길,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8-10절의 내용이 이 사실을 중첩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길은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며, 우리의 삶의 목적이시고, 우리가 자라야 할 최종의 목표가 되시며, 우리의 영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풍성한 삶이란 물질적인 풍성함만이 아닙니다.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혹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육신적인 풍성함이라고 하니까 물질이 풍족한 부요한 삶을 생각하기 쉬운데 세상이 원하는 그런 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풍성함은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한 삶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 많아야 풍족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풍족함은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모범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4:11-13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비결은 오직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부자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를 때, 두 번째는  병들어 돈이 없을 때, 세 번째는 나이가 들어 배우자를 잃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는 이해가 되는데 첫 번째는 이해가 잘 안 되지요? 부자로 태어나서 부족함을 모르는 것이 어떻게 고통이 됩니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부자라는 것 즉 사람이 부족함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만족도 행복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 완전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부족함을 알 때에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되고, 추구한 것을 얻었을 때에 행복과 만족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모르는 부자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알지 못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특히 물질적인 풍부함으로 영적인 고갈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은 인생의 끔찍한 결말이 예고된 비참한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마지막 세대를 의미하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네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러분은 이렇게 세상의 것에 빠져서 영원한 생명인 영의 삶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풍성함입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드린 말씀이 육신의 삶보다는 영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삶도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풍성하게 하신 삶은 첫째는 영의 생명이지만 두 번째는 육신의 삶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 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이 강건하고 풍성해야 육신도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풍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신명기 5:28-29절에서는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애절한 마음으로 풍성하게 잘 되기를 바라시고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애절한 마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11-32절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애절하게 표현하셨습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지요? 며칠 전 인터넷에서 이런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동영상은 독일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광고입니다. 광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광고에는 어떤 쓸쓸한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 아버지는 해마다 혼자 쓸쓸하게 크리스마스를 지냈습니다. 자식들이 해마다 “내년에는 꼭 갈게요.” 라는 뻔한 거짓말로 하염없이 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부고를 보냈습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자녀들은 황망하고 슬픔에 차서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집에는 장례식이 아닌 성대한 크리스마스 만찬 테이블이었습니다. 놀라는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너희 모두를 집에 불러 모을 수 있었겠니?”
그리고는 수년 만에 온 가족이 즐거운 만찬을 즐기는 모습으로 광고가 끝납니다.

이 광고 동영상을 보면 지금 부모님께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저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지금 우리를 향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헛된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풍성한 생명의 선물을 줄 수 있을지를 안타까워하십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죽음의 길로 달려가면서도 그 길이 행복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지금도 애타게, 애절하게 부르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2:17절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마지막까지 진정한 생명의 길로 오라고 애타게 부르십니다.

※ 선한 목자의 우리에 들어가는 것이 풍성하게 되는 길입니다.

본문 9절 말씀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양 우리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 우리에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유인하는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6절에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면, 본문 8-9절에서도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풍성한 생명과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제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합시다. 이것이 나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도록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마음을 예수님께 드립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영과 육신의 풍성한 삶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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