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수 있는 행복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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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15 21:57
*** 일할 수 있는 행복 / 마태복음 20:1-16
마태복음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전 세계적으로 청년 실업률이 이슈라고 합니다. 올해 국내 청년 실업률이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인 10%를 넘어서면서 국내 ‘니트족(NEET)’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니트족이 뭔지 아십니까?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약자인데, ‘일할 의지도 없고 공부도 안하고 자기계발도 하지 않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쉽게 말해서 ‘15∼34세 사이의 취업인구 가운데 미혼 상태지만, 학업 및 가사 일을 하지 않는 무직자’를 뜻합니다. 국내 15-29세 청년 실업률은 6월 기준으로 10.2%이며, ‘니트족’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은 19%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젊은이들은 놀고먹는 게으름이 몸에 배고 있습니다. 이처럼 놀고먹으려니 도둑질과 강도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12절에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정은 성경 모든 곳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제자들까지도 쉴 겨를이 없도록 일하셨습니다. 로마서 12:11절에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청년 실업률이 높다고 하지만 사실은 일손이 없어서 쩔쩔매는 기업도 많습니다. 소위 'three D(dirty, danger, difficult)' 업종이라고 불리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일손은 부족하지만 실업률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의 높고 낮음도, 귀천도 없이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들을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일거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여 좋은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포도원 품꾼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는 과정과 그들에게 품값을 지불하는 과정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하신 의도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려고 하십니다. 본문 1절을 시작하면서 “천국은 마치 …”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나타내십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곳’임에 대하여 경각심을 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끝까지 자신의 열정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한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일했든지 짧은 시간을 일했든지 냉수 한 잔을 대접한 상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주어진 일에서 끝까지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판흥부전’을 아십니까? 본래의 흥부전은 박정한 부자 놀부와 선한 가난한 흥부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새롭게 각색된 신판흥부전에는 가난한 흥부는 무능하고 부자 놀부가 현실적이라는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이뿐 아니라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히 쉬지도 못하면서 여름 내내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와 노래하며 즐기면서 허송세월을 보낸 배짱이의 이야기도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신판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그 해석이 전혀 다릅니다. 이야기 속의 베짱이는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고 불성실한 곤충인 반면에 개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준비할 줄 아는 지혜로운 곤충이지요. 만일 이야기대로라면 베짱이는 굶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올해도 내년도 계속해서 베짱이는 울어 댈 것입니다. 땅이 있는 한 언제나 개미도 존재하고 베짱이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판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개미같이 일만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베짱이처럼 아름다운 노래와 예술로 삶에 지친 인생을 즐겁게 하는 인생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 것일까요? 아무튼 흥부와 놀부 개미와 베짱이 등 그 누구든지 중요한 것은 끝까지 열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쪽의 19장 마지막 절에서도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도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하십니다.
본 비유의 전개 과정인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부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여섯 시를 시작으로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 마지막으로 일과가 끝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까지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냅니다. 이처럼 품꾼을 부르시는 농장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품꾼은 저와 여러분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품꾼들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부르심의 목적을 잘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5:14-15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렇게 각 사람을 불러 각 자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낼 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품꾼들의 힘이나 노력이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농장 주인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로 찾아가서 사람들을 모아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이 품꾼들을 모을 때에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오후 다섯 시에는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소유나 학식 등을 평가하여 부르지 않으십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랑 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셔서 일을 맡기심에 감사하면서 끝까지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계시록 일곱 교회 중의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서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지 않도록, 가룟 유다처럼 버림받지 않도록 끝까지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 결산과 보상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6절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구약과 신약 공통적으로 약속하시는 말씀은 결산과 보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로마서 2:6-8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본문말씀에서도 하루 일과가 끝나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일한 사람들에게 각각 삯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바로 ‘일한 삯’ 즉 ‘보상’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부름 받은 시간이 다르고, 일한 시간의 양도 다릅니다. 그러나 결산의 시기는 똑 같으며, 일에 대한 기본적인 대가도 같습니다. 즉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일에 대한 결산의 시기와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즉 각 사람이 육신으로 살던 때에 행하였던 것을 내놓아야 하는 결산과 그 결산의 결과에 대한 보응입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염소와 양의 비유, 므나 비유 등. 여러 각도로 마지막 때에 있을 결산과 보응을 비유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결산과 보응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경영해야 합니다. 대충 적당한 신앙생활로는 절대로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차별 없이 ‘구원’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본문의 비유처럼 부름 받은 시간이나 일한 시간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똑 같이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이것은 차별도 없고 사람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셨고 에베소서 2:8-9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시는 ‘공력에 따른 상급’입니다. 즉 자신이 행한 것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순교자의 상급이 있고, 전도자의 상급이 있고, 양육자의 상급이 있고, 봉사자의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41-4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시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하고 싶다고 일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말씀에서의 일은 물론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한 목적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아무 때나 또 아무나 부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역대하 15: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일할 수 있을 때, 병들든지 장애를 입던지 어떤 이유로든 일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지금 기회가 있을 때 결산과 보응의 때를 생각하면서 주어진 일을 끝까지 열정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매일의 삶이 보람 있고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는 감사의 삶이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