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것을 위하여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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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2-07 20:32
*** 더 나은 것을 위하여 / 열왕기상 17:8-16
열왕기상 17:8-16,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게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한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하면 ‘버림과 얻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그리고 로마서 8:13절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서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로 죽은 인생을 살려주시려고 하나님 됨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길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빌립보서 2:5-1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대강절 절기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림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이름을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더 설명이 필요 없도록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이 통치하던 때입니다. 이 아합 왕은 그때까지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자신은 우유부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소심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은 나라를 부강하게 할 목적으로 이방나라인 ‘시돈’과 정략결혼으로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아합 왕이 시돈에서 데려와서 왕후로 삼은 여인은 ‘이세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바알’신과 ‘아세라’여신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아합은 왕후 이세벨의 꾐에 빠져서 온 나라에 바알과 아세라를 위한 신전을 짓고 제사장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본문 앞쪽의 16:33절에서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엘리야’를 통하여 가뭄과 기근으로 징계하겠다고 아합에게 통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냇가 바위동굴에 숨기셨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시냇물이 마르기까지 까마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으며 시냇물을 마셨습니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시내도 말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 엘리야가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머물 거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막 도착했을 때에 마침 성 입구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물을 조금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바로 그 때, 엘리야는 다시 “떡 한 조각도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여인은 난처한 기색을 나타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음식이라고는 우리 두 식구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먹을 양의 밀가루와 기름뿐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 말대로 그렇게 하되, 먼저 나에게 떡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자기 동족도 아닌 이스라엘 사람이, 이 가뭄으로 물 한 방울이 귀한 판에 대뜸 물을 달라고 하지를 않나, 한술 더 떠서 떡까지 달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분명히 자신도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구워먹을 떡 한 덩이의 밀가루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그것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신이지 시돈의 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12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곧바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한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져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잃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얻는 결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요한복음 12:24-25절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일단은 먼저 무엇이 더 나은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도 평범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채우려면 먼저 빈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그릇이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다면 당연히 비워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어떤 것을 새롭게 가지려한다면 먼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유익한지를 따져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것보다 새로운 것이 더 낫다면 지금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25절 이하에서 제자의 길을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비유를 하셨습니다. 28-32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말씀은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끝까지 할 수 있을지를 신중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사르밧 여인에게 물과 떡을 요청했습니다. 결코 부탁하거나 사정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요청한 것입니다. 이는 부드럽지만 강한 명령입니다.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의 그 난감한 요청에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여인은 처음 대하는 이방인인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따를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고민과 생각이 따라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것을 요청하실 때에는 자신이 져야 하는 책임을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요청하십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거나 사정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일을 좀 해달라거나, 헌금을 좀 해달라거나, 시간을 좀 내달라고 사정하거나 부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생명도 삶도 물질도 자녀도 모든 것이 잠시 우리에게 맡겨두셨을 뿐입니다. 달란트나 므나의 비유에서처럼, 주님이 결산을 위하여 부르실 때 까지 이익을 내라고 맡겨두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 자신의 생각을 결정했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의 요청에 잠시 고민하고 생각했지만 곧 결정을 내렸고 실행했습니다.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음식을 엘리야 선지자와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즉 여인은 엘리야와 그의 하나님을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본문 뒤쪽 24절을 봅시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엘리야도 그의 하나님도 믿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확실한 믿음이었지만 그 여인은 헌신을 결정했고 그대로 실행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에 진실한 믿음으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두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그를 만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결정을 믿음으로 실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믿음의 진실함과 거짓됨을 구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받게 됩니다.
본문 이후의 17-24절에는 사르밧 여인의 집에 또 다른 우환이 닥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부인 그 여인의 외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여인은 ‘당신이 괜히 우리 집에 와서 아들을 죽게 했다.’고 엘리야를 원망합니다. 그 때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라고 엘리야 선지자도 영문을 몰라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아이의 생명을 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순종했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유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일을 체험한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죽는 일을 통하여 보다 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육신의 생명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의 생명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요청에 불확실한 믿음으로 결정하고 순종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대가는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나를 구원하러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나도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의 것, 보다 더 나은 영원한 것을 선택하고 순종하여 하늘의 보화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