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457회 작성일 2015-09-25 14:31

*** 내가 선택해야 할 것 / 창세기 2:7-9, 15-17


창세기 2:7-9, 15-1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선택! 우리가 날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나기 무섭게 시작하여 온종일 계산하고 마음 쓰는 일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이동 수단, 만남, 대화 등등.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예전에 어느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선택하는 것 중에는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비행기 추락 사고가 났을 때 한 가정의 운명이 갈라졌습니다. 부모와 두 자녀, 네 명의 가족이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비행기 좌석이 모자라서 어머니와 두 자녀가 먼저 출발을 했고, 다음 비행기로 아버지가 출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비행기가 추락하여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사망한 것입니다. 이 선택으로 삶과 죽음이 갈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 갈라지는 선택입니다. 신명기 30:15-16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에서의 생명과 사망은 육신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일입니다. 5일 동안 천지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다른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첫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친히 흙으로 빚어서 만드셨습니다. 육체를 흙으로 만드시고 그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육신과 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을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환희’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은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동산 중앙에는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열매를 제공하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열매를 맺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만 제외한 모든 것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열매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최초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최초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생명과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생명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욕망은 간사하고 어리석어서 당장 눈앞의 유혹을 따라갑니다. 사람의 마음은 일단 욕망이 일어나면 제어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사람의 영을 미혹하는 사탄은 그 사람의 약점을 파악하여 자신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도록 유혹합니다. 창세기 3:4-5절을 봅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의 유혹을 받은 하와의 마음에는 이미 먹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서 선악과가 너무나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유혹에 약하여 눈앞의 이익을 따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녁 서늘할 때에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미 선악을 깨닫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겼음을 알았고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어긴 아담에게는 일을 해야 먹고 사는 고통을 주셨고, 하와에게는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셨고 남편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유혹의 원천이었던 뱀은 평생 흙을 먹으며 배로 기어 다니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보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에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선택과 책임과 보응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6:2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와 나사로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의 보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기 위하여 생명과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내용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도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입니다.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적인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이것이 선악과의 효과입니다. 나 자신의 생각, 내 뜻으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즉 불평하고 원망하며, 분노하고 갈등하며, 염려하고 근심하는 이런 일들은 자신의 생각의 결과물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일하다가 어느 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도망쳤습니다. 이 사실을 안 라반이 화가 잔뜩 나서 자신의 종들을 거느리고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을 통하여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31:24절입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러서 야곱을 나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29절입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너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판단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선택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군중심리적 선택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외되는데’ ‘지금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해’ 등등. 지금 세상이 흘러가는 대세(大勢)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생명의 길도 아니며 안전한 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13-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길이 안전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선악과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하여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내가 생각할 때에 이 길이 옳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실험을 해 본 내용입니다. 
도시의 큰 도로에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횡단보도의 중간 지점에 서서 팔을 들어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향해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양방향으로 지나가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한 사람이 더 서서 두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역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간간이 한 두 사람이 그 사람들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며 지나갈 뿐입니다. 한 사람이 더 가세해서 세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볼 때까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사람들이 세 사람이 보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같이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으며 웅성거립니다. 

이것이 군중심리(群衆心理)입니다. 하늘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만 의기투합해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휩쓸리게 됩니다. 이 삼의 법칙 현상을 나쁘게 보면 이런 군중심리를 사탄이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정말 주의해야 할 선택입니다. 이 삼의 법칙을 좋게 보면 ‘교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4: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사탄이 군중심리를 사용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마지막 때에는 힘을 모아서 세상의 세력을 대항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선악과의 결과물인 하나님을 무시한 스스로의 판단이나 군중심리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생명과입니다. 생명과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신명기 30:15-16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즉 에덴동산의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성전입니다.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9-2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성전 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생명과를 선택한다는 것은 새롭게 열어놓으신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선택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매일 수많은 선택해야 할 것들이 다가옵니다. 그 모든 선택에서 선악과를 택하지 말고 생명과를 택하십시오. 즉 자신의 생각과 뜻 혹은 군중심리를 따라 선택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판단하고 선택하십시오. 선택해야 할 때마다 선악과와 생명과를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삶에서 에덴동산 즉 기쁨의 삶을 회복하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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