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지금 갖추고 있어야 할 신앙의 삶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192회 작성일 2015-08-31 12:24

*** 지금 갖추고 있어야 할 신앙의 삶 / 히브리서 10:19-27


히브리서 10:19-27,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 들어가는 말

우리 속담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큰물에서 활동해야 하며, 큰 무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대도시로 몰리고,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고군분투합니다. 넓은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만큼 유명해지고 유명해지는 만큼 자신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세상적인 관점이자 가치관인 ‘출세 지향적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출세 지향적 삶에 매여 죽도록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바람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과거로부터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15-17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는 이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신앙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이 본문말씀은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22-25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만족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생명과 만족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고, 좋은 집이 있고, 좋은 자동차가 있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되면 될수록 무엇인가에 빠지려고 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에 자신을 던지고, 사업에 미치려고 하고, 쾌락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혹시 자신이 나타내야 할 신앙의 삶을 알지만 자신의 마음에 묻어두고 모르는 척 세상을 따라 흘러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나던 중세시대의 일입니다. ‘바젤’에 살던 ‘마틴’이라는 믿음의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마틴은 타락했던 당시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 거실의 벽돌 하나를 빼내고 양피지(가죽종이)에 다음과 같이 쓴 글을 넣어놓았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나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바젤의 ‘마틴’이 써서 감추어둔 이 글은 약 200년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틴 루터’입니다. 마틴 루터도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하고는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리오.” 
마틴 루터의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은 세계의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이 개혁이 불씨가 되어 오늘의 개혁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마땅히 나타내야 할 신앙의 삶을 찾고 담대하게 나타내고 실행해야 합니다.

※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이사야 1:18-2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11:28-3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위하여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란 우리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대화하고 삶을 함께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삶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원만한 교제를 하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말씀에서 밝혀주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악을 씻음 받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어둠이 있으면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5-7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가지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고 거짓 없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과자 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과자를 굽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과자 집에는 과자를 사려고 하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과자 굽는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슨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이 가득하고, 온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과자 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가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율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으며, ‘기름칠한 듯한 탱탱한 삶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과자를 구우면서 자주 하는 말은 “결코 어제와 같은 과자를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으로 살아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과자에 새겨 넣고 싶다’는 말입니다. 
별스럽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별 것도 아닌 과자 굽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일 년이면 한두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기도드리고 싶은 과자가 구워졌어요. 이런 과자를 굽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그래서 하나님께 고이 바쳐서 제사 드리고 싶은 과자예요.”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으로 순수하고 멋지게 사는 사람이다.’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별것 아닌 과자를 굽는 것이지만 매일을 새롭게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싶을 정도의 과자를 만드는 삶의 모습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환경’과 ‘재능’과 ‘부족한 물질’, ‘건강’ 등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이런 변명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21절의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아 성실하게 일하여 남긴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이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핑계와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재능이 얼마가 되었든지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본문 23-25절을 봅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즉 예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않도록 하고, 사랑과 선행을 하면서 서로 독려하고 모이기를 힘쓰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선행과 그리스도인의 모임.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랑과 사랑으로 인한 선행은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시며, 사도행전 10:38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 선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6:10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어떻든 사랑과 사랑으로 인한 착한 행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입니다. 

앞의 예화에서 과자를 만드는 일에서 보았듯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므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하듯이 성실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특히 지금은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불신이 가득해서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삶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사랑과 선행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랑과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진실한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는 것이 정이 들고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일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인 남자의 친구가 여자와 가까이 있어서 자주 멀리 있는 남자 친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는 자주 만나던 자신의 남자의 친구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야 정도 들고 진실한 사랑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 하면서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창세기 5:24절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으며, 6:9절에서는 “이것이 노아의 족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온전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이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돈도 항상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일할 수 있는 건강이 항상 있지도 않고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도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고 거짓 없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죄의 자리에 머물게 되면 본문 26-2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내며, 모이기를 힘써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진실한 삶으로 준비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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