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신앙의 새 옷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057회 작성일 2016-03-09 17:21

*** 신앙의 새 옷 / 야고보서 2:14-22

야고보서 2:14-2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들어가는 말

꽃의 전령인 매화가 피고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여 곧 황량했던 산과 들판이 화사한 꽃과 연두색 옷으로 갈아 있겠지요. 어저께는 이은상 시인이 지은 ‘봄 처녀’라는 시에 홍난파 씨가 작곡한 노래를 들었는데 그 표현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봄 처녀 제 오시네 / 새 풀 옷을 입으셨네 / 하얀 구름 너울 쓰고 / 진주이슬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 뉘를 찾아오시는고 / 님 찾아 가는 길에 / 내 집 앞을 지나시나 / 이상도 하오시다 / 행여 내게 오심인가 / 미안코 어리석은 양 / 나가 물어볼까나’ 아름다운 봄의 풍경이 그려지는 시입니다.

이처럼 모든 만물은 제 철에 맞는 표현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표현은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은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절을 따라 정직하게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꾸지 않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장신구와 기교를 다한 화장으로 자신을 가꾸면 잠깐은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3-4절입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의 아름다움이란 ‘영적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그 사람의 생활을 통하여 표현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하얀 70세가 넘어 보이는 어떤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드신 분들이 그러하듯이 장로님도 엄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장가 간 아들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묻습니다.
“아버지, 왜 전화하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기는…” “그런데 왜 전화하셨어요?” “아니, 다른 게 아니고 말이지. 사실 있잖아 …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뭐라고요 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말이야 …” 아들이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을 잇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한게 많아…” 그리고는 아들이 대답이 없자 전화를 끊었습니다. 세 시간 뒤에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 제 남편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뭐라고 하셨기에 저렇게 방에 들어가서 한 시간째 울고 있어요.”

장로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서툰 사랑 표현에 그만 지금까지 억눌렸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가족들이나 일가친척들, 친구들, 이웃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마음에만 담아두고 표현도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마태복음 5: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리고 가장 가까운 부부, 부모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표현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감추어 두던 것이 미덕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잘 듣고 신앙의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를 바랍니다.

※ 실현되지 않은 믿음은 그림 속의 떡입니다.

본문 19-22절을 봅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19절 말씀은 헛된 믿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순종이 없는 헛된 믿음을 말합니다. 귀신들 즉 마귀들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도 있고 두려워 떨기까지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거나 믿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헛된 것입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만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순종하여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마지막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잡으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져 순종될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한 밤중에 갈릴리 호수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물 위로 뛰어 내려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자 곧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서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말씀과 믿음과 삶이 결부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또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이며, “그림 속의 떡”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말씀에 대한 믿음은 생활 속에서 순종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삶이 결합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 중의 하나는 뜬금없이 “니, 내 마음 알제?”라고 묻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고는 자기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 황당한 것은 그 말을 듣고는 “그래, 니 마음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노.”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정말 잘 통하는 사람 같습니다. 만일 서로가 자신을 잘 표현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알겠지요. 특히 아내 되시는 분들, 뜬금없이 남편에게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투정을 할 때는 남편들은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아무런 생각이 안 나지요. 남편들은 자신의 의사도 표현하지 않고는 아내를 몰아세우면 자다가 뒤통수 맞는 느낌이 됩니다.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더라도 평소에 표현을 잘 하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알지요.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표현을 하십시오. 오늘 본문 15-17절을 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배고픈 사람에게 백번 “안 됐다.”고 말하고 불쌍히 여기면 무엇 합니까? 차라리 말없이 빵 하나라도 주고, 적은 돈이라도 손에 쥐어주는 것이 좋지요.  즉 백 마디 말보다는 하나라도 작은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즉 표현하지 않는 사랑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면전에서 책망하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적어도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EBS 교육방송에서 ‘다큐프라임’으로 제작한 ‘가족 쇼크’라는 기획물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아이들과 부모의 소통 장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정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에게 이제는 다정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합니다. 어렸을 적 아주 작은 것에도 아끼지 않았던 엄마의 칭찬은 이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금 잘해서 ‘이번에는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겠지.’ 싶으면 엄마는 다른 아이들은 어떤지부터 묻습니다. “우리 엄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부모들은 말합니다. “아이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부모, 힘든 일이 있을 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루 중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듣는 말을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 “우리 이쁜이. 귀염둥이. 순둥이.” / 초등학교 6학년생 “휴대전화 좀 꺼.” / 중학생 “공부해… 공부해!”
학년이 높아질수록 부모님과의 대화 시간은 줄었고, 부정적인 말은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중학생들에게 요즘 고민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묻자 ‘성적 얘기엔 민감하지만, 진짜 나에게 심각한 고민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답합니다.
한없이 자애로울 것만 같았던 엄마 아빠가 성적이 눈에 보이는 중학생이 되면 갑자기 변합니다. 이때부터 부모와 아이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마음의 문을 닫은 아이들은 막다른 상황에서도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바라는 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대로 삶을 놓아버리면 이 모든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겠지. 그냥 살지 말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내가 이런 생각마저 하고 있다는 걸 과연 부모님은 알까.”

대표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지만, 부부 사이에도, 고부간에도, 형제자매간에도, 친구 사이에도 모든 인간관계에는 이처럼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이나 불통(不通)이 존재합니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은 표현 부족입니다. 그래도 사람 사이에는 서로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은 편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의 삶은 절대적인 신앙의 표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특성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마음을 엉뚱한 행동으로 숨길 수 있겠지만 결국은 행동은 마음을 따라가게 됩니다. 예전 일제 강점기 때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면서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비록 억압에 의하여 몸은 우상에게 절을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믿어집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끌리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면 내 생활의 행동 속에서 그 신앙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제 한 가지만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표현이 사랑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 중에서 사람의 깊은 상처까지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교수인 ‘에버렛 워딩턴(Everett L. Worthington Jr)’교수는 1955년에 자신의 어머니가 강도에게 살해를 당한 후, 그 살인자를 용서하는 문제를 붙들고 오랜 기간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용서에 이르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아주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 남에게 피해를 당했을 때 그 피해보상의 길은 많지만 완전한 치유와 회복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용서와 화해는 간단치 않다. 용기와 헌신과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만 먹는다면 오히려 귀한 관계가 되어 보물을 주고받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는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독생자 예수님을 화해를 위한 제물로 내어주시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2절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여러분, 마음에 쌓인 원망과 억울하고 답답한 아픈 마음이 있습니까? 진정한 해결법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표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사순절의 기간에 이제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닮아서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실현하고 표현하는 새 옷으로 갈아입읍시다. 본문 22절이 결론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표현하는 신앙, 표현하는 사랑으로 이 시대에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된 교회로 세워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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