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 아름다운 사람 / 베드로전서 2:18-25
베드로전서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멋있다.’,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는 편입니까? ‘멋있다. 아름답다.’ 라는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말입니다. 이 ‘아름답다.’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상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모양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내면의 풍기는 인품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말이나 행동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운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영적인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영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아름다움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인품과 그로 인한 삶이 어우러져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모가 잘 생기지는 않았을지라도 내면의 인품이 묻어나는 선한 모습의 아름다움도 갖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의 모습이 천사와 같았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었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런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40:6-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당시의 박해와 핍박으로 인하여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와 유대인들의 박해와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이 심할 때였습니다. 그 혹독한 시련과 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갖도록 보낸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본문말씀은 믿지 않는 상전을 둔 종들에게 주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종이나 노예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를 ‘믿지 않는 자신들의 잔인한 상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종들과 믿지 않는 상전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베드로는 좀 더 자세하게 신앙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본문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본문말씀의 핵심입니다. 이후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25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 돌아온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자취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본문말씀은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삶의 자취이며 이를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임을 가르칩니다.
※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1828년 러시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외모는 부모조차도 실망할 정도로 못생겼습니다.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손과 발 때문에 아이는 자라면서 늘 비관했습니다.
“나는 못생겨서 행복하지 못할 거야.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답게만 해주신다면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 미래에 가질 것도 모두 바치겠습니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하고는 달리 외모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참 아름다움이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깨달음을 얻고 열심히 글을 쓰며 앞날을 개척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전쟁과 평화', '부활' 같은 작품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예로부터 인간 사회에서 인기 있는 사람은 유머와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가 뒤숭숭한 지금의 시대에는 더욱 대세가 코믹하고 웃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한술 더 떠서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여 성형산업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사람들을 외적인 치장에 열을 올리게 했습니다. 얼굴 성형, 몸만들기, 화장, 학력 쌓기, 경력 만들기 등. 진정한 능력과 내면의 아름다움은 관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은 이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9절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세상의 여러 가지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굳게 서 있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하십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마음의 계획과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신실하고 충성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6: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계속해서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산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싶고 알아주기를 바라고 칭찬받기를 좋아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가 행하는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러 다른 말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25:34-40절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께 칭찬 받은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이 전혀 주님을 위한 것인 줄 알지 못했음’을 봅니다. 즉 이들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소외된 사람을 돌보고 구제와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행하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알아줄 뿐만 아니라 그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풍성하고 복되게 하십니다.
※ 아름다운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19-21절을 읽어봅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새해 벽두부터 어려운 일을 이야기 하게 되는데,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평안하고 안전하게만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도 없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에 있으면 폭풍이나 거친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지만 그렇게 되면 배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배는 거친 풍랑을 헤치고 항해하여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거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 때문에 손해를 보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자신의 마땅한 권리조차 포기하면서까지 선을 행하여 내면의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것이 존재 목적입니다. 등불은 밝은 곳에서는 아무른 쓸모가 없으며, 간이 잘 맞는 음식에는 소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두운 곳, 맛을 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자신의 권리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소망을 주며, 삶의 맛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5절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성숙하게 변합니다. 식물은 왕성하게 자라고 꽃을 피울 때가 아름답지만 성장의 목적이자 진정한 아름다운인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는 긴 시간을 지나 성숙했을 때에 맺게 됩니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도 젊음이 아름답지만 연륜의 지혜나 원숙한 삶의 맛을 내지 못합니다. ‘토지’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사람은 연륜이 쌓여 갈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이 좋았다.”며 과거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과거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과거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일은 잘 되겠지.”라며 미래에 기대지도 마십시오. 미래는 현재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지금 하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지 못하면 소망도 밝은 내일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지난 6일 새벽에 대만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또 많은 생명들이 갑자기 종말을 맞았습니다. 인생의 밤은 소리 없이 찾아옵니다. 나이도, 연륜도, 건강도,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갑자기 사고로, 병으로, 천재지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이 내게 종말이라 할지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