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401회 작성일 2016-02-02 23:03

***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 / 고린도후서 5:17-21

고린도후서 5:17-21,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세상 살기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흔히 ‘살맛난다.’라고 할 때, 살맛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살맛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살맛나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많고 건강하고 편안하면 살맛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살맛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은 공기와 물과 음식입니다. 이 중에서도 맛을 내며 인생을 즐겁게 하는 것은 음식입니다. 이 음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간이 맞지 않으면 그 맛을 제대로 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이 소금이듯이 인생에도 소금처럼 맛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소금에 비유한 삶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 맛을 내는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로 편을 갈라서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등. 이들에게 사도 바울은 서로 화목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자기 목숨까지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쪽의 15절을 봅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생명의 빚을 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목을 이루는 역할을 맡기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20-21절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것을 명하는 말씀입니다.

※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은 화목입니다.

마가복음 9:5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43-48절까지의 가르치심에 대한 결론인데 그 교훈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50절에서는 죄의 유혹과 정욕을 제어하고 하나님과 또한 사람과 화목을 이루게 되면 지옥 형벌을 면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2:14절을 봅시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정말 심각한 경고입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팔복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화목을 이루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두 사람만 함께 있어도 화목하지 않으면 서로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합니다. 가정이 불화하면 살맛이 안 나고, 회사의 직원들 사이가 불화하면 불편합니다. 화목하지 않는 곳이 곧 지옥입니다. 잠언 17:1절에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시며, 21:9절에서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화목하지 않는 곳은 그만큼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합니다.
이름난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 스승 밑에는 언제나 많은 제자들이 모여와서 가르침을 받고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감흥이 돋은 한 제자가 말했습니다. “저것 봐. 나뭇가지가 움직이고 있군.”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제자가 “어허 무슨 소린가. 저건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라며 딴죽을 걸었습니다. 결국 두 제자는 서로 자기가 옳다고 입씨름을 하자 주위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한 마디씩 참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 …’ 급기야 제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라네.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네들 마음일세.”

이 이야기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는다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지식을 쌓는 일 자체가 쓸모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말로는 화해와 일치, 소통을 말하지만 실상은 작은 일상 속에서 조차 자기 뜻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일을 어려워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면서 가르치신 삶의 표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을 봅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지금 우리 시대에 지키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명령하신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준적 삶입니다. 화목과 화평을 이루려면 이처럼 자기의 권리마저 포기하고 자기 이익까지도 양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 18절에서 하신 말씀대로 ‘화목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목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에 맛을 내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과의 화목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문 18-19절은 사람과의 화목, 20-21절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8-19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대로 세상에서 사람들과 화평하며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신 화목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순종함으로서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세상에 맛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은 덕스러운 말입니다.

골로새서 4:6절을 봅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그리고 에베소서 4:29절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야고보서 3: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36-37절에서 심각하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말은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상급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대화나 언어적인 표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가 될 수도 있고 주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도 불신자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통하여 덕을 끼치고 좋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말은 마치 솜옷 같이 따뜻하게 하지만 사람을 해롭게 하는 말은 가시덤불 같이 아프게 찌릅니다.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2절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말로 어떻게 세상에 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높여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뭉클한 감동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감동은 행복감을 주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곧은 말, 정직하고 진실한 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비난이나 업신여기는 듯 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잠언 25:15절에서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했습니다. 부드러운 표현으로도 얼마든지 올바르고 정직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말도 목소리를 높여서 비난조로 말하게 되면 상대방은 불쾌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도 20-30대에는 정의에 불타서 옳은 말을 잘 했습니다. 잘못하는 꼴을 못 봐내는 정의파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꼭꼭 찌르는 말을 잘 했습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신학교 동기들이 말하기를 ‘그 때에는 정말 내게 말 붙이기가 힘들도록 찬바람이 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에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인생 연륜과 신앙이 조금씩 쌓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도 말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내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말이 부드러워지고 배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다고 불의와 타협한다든지 정의로운 마음이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표현의 방식이 달라진 것이지요.

세상에 맛을 내는 말이란 이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며 감동과 행복감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대상을 가리지 않는 조급함과 폭력이 난무합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화목을 이루거나 부드러운 말을 할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아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이기적이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삶이 어두워가고 있을 때 우리가 화목을 이루는 중재자로서 또는 덕을 끼치는 말로서 세상에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가 2016년에는 이렇게 작지만 세상에 맛을 내는 교회로 일어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이로 인하여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우리의 삶에도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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