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밝히기2 - 성실과 진실
*** 세상 밝히기 2 - 성실과 진실 / 마가복음 12:38-44
마가복음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험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 들어가는 말
2016년의 첫 주간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소망과 기대감으로 설렘이 있는 생활이셨습니까? 사람은 일평생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해가 바뀌어서 새해가 되면 더더욱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은혜를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기대감과 소망이 없다면 맛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9:18절에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묵시”라는 말은 '계시(revelation)' '예언(prophecy)' '예언적 환상이나 꿈(prophetic vision)' 등의 의미가 있으며,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떠나게 하다.’ ‘발가벗기다.’ ‘멸망시키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시’를 ‘vision’으로 풀이해서 단순히 ‘자신의 비전 즉 꿈’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본 의미에 잘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한 소망과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은혜를 기대하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말씀을 근거하여 ‘세상을 밝히는’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는 목적과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세상을 밝히기 - 진실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들을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자세를 빗대어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높은 자리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옷에 술을 단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서서 거들먹거리며 인사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옷에 술을 다는 것은 하나님 의 말씀을 기억하며 경건한 모습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15:38-40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경건한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 술을 길게 달고 긴 옷을 입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는 외식적인 행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앞의 서기관들의 외식과 대비 되는 과부의 진실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당시의 통용되는 화폐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액수를 나타내는 렙돈(동전) 두 개를 헌금했지만, 부자가 드리는 금전보다 더 인정받는 헌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삶이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산법이 어떠한 것을 우리에게 귀띔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진실한 신앙생활이 되어야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실함은 어떤 것입니까?
지난 주일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하신 마태복음 5:16절의 내용이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하고 선한 삶으로 자신을 나타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생활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빛의 생활을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9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즉 빛으로 나타나는 삶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생활입니다.
어느 시골의 한 탄광촌에서 한 소년이 친구들과 놀다가 아름다운 보석을 하나 주웠습니다. 소년은 저녁때에 아버지에게 자랑했습니다. “아버지, 이것 보세요. 친구들과 놀다가 주웠어요. 참 예쁘지요? 저는 커서 이런 보석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는 등잔대 위에 있는 호롱불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얘야, 보석 같은 사람보다는 이런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러자 소년이 즉시 대답합니다.“호롱불은 입김만 불어도 꺼지잖아요! 전 언제나 밝게 비추는 보석이 좋은데요.” 아버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아들아, 보석은 다른 불빛 아래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잖니, 보석도 좋지만 호롱불은 비록 약해도 이 세상이 어두울 때 자신을 태워서 세상을 비춰주니 호롱불 같은 사람이 더 귀하잖니?”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나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빛입니다. 이 진실함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2:9절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거짓 없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이며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게다가 ‘거짓이 없다.’고 하여 ‘꾸밈이 없는 진실함’을 더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처럼 꾸밈이 없는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눈가림과 요령으로 사는 것이 마치 자랑스러운 듯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사람이 보지 않는 데서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적당히 대충 요령껏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Coram Deo(하나님 앞에서)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염려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5-9절에서 상전에 대한 종들의 자세와 상전들의 자세를 통하여 진실한 삶을 요구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요즘 사회에서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사용자들은 이런 갑질을 하지 말고 노동자들은 눈가림만 하지 말고, 진정한 상전인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사실 그 아래에서는 천정의 그림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아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가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다가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바로 이 그림이 지금도 여행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바티칸 시스틴 채플실의 유명한 정정벽화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입니다.
자기의 삶은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성과 정직성은 사람을 만드시고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자신의 삶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하나님이 아시고 자신이 압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6절에서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삶이 성실과 진실한 삶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성실과 진실함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일에 대하여 보여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다가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결국 형들에 의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했고 애굽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렸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고 잠도 자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요셉은 그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믿었고 비록 노예였지만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준수한 모습에 끌려 추파를 던졌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일에 끌려들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결국 보디발 아내의 원한을 사서 모함을 받아 이제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정말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듯이 요셉이 그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성실과 진실함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요셉의 그 모습을 보았다면 ‘저 놈 미쳤다.’고 할 정도로 우직하게 성실과 진실하게 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 상황이 13년을 갔습니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잠시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으면, 2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하십니다. 결국 요셉의 성실과 진실함은 빛을 발하여 애굽 왕 바로 앞에 서게 합니다.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지혜로운 간언을 들은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2인자인 총리로 지명하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의 장면도 그러합니다.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돈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에게 있는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헌금한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헌금한 과부의 진실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사람들은 외식적인 신앙을 잘 눈치 채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갈라디아서 6: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다윗이 사무엘하 22:25-2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과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실과 진실함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없는 성실과 진실한 삶을 이루면 그 사람의 영은 아주 밝아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그 사람 속에 있는 빛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성실과 진실성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진실한 삶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따르게 됩니다. 이제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속에서 주님의 빛을 보고 느끼도록 성실과 진실한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