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닙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026회 작성일 2015-12-28 21:13

***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닙니다. / 로마서 10:1-4


로마서 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조금 덜 된 사람에게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합니다. 사람다움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길이라고 다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아무 길이나 막 가다가는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인생길은 반드시 가려서 가야 합니다. 시편 1:1-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2015년 한 해를 어떤 길로 다니셨습니까? 혹시 가서는 안 되는 길로 가지는 않으셨는지요? 

1849년 12월 21일, 스물여덟 살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형장에 섰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페트라솁스키(1821~1866)가 주도한 독서모임에서 활동하다가 반체제 혐의로 검거돼 사형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서유럽 자유주의 사조의 유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젊은 지식인들에게 본보기로 이들을 검거한 것입니다. 형이 집행되던 날은 영하 50도의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사람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진 채 사형대에 묶였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최후의 5분이 주어졌습니다. 그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은 훗날 그가 쓴 ‘백치’라는 장편소설에 상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5분을 어떻게 쓸까? 2분은 옆에 있는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또 2분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
짧은 5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막 형이 집행되려던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사형 직전에 풀려난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됐습니다. 그는 사형수로써 느꼈던 시간의 소중함을 한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쉴 새 없이 작품 활동을 하였고,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죄와 벌'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해 톨스토이에 비교되는 문호로 남았습니다.

길을 잘 못 들면 이렇게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육신만 잘 못 된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영의 생명을 망치게 되면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을 잘 찾아야 하며, 함께 동행 할 사람도 잘 찾아야 하고, 해야 할 일도 잘 찾아야 합니다. 이제 지나온 2015년은 잘 걸어온 길이든 잘 못 걸어온 길이든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잘잘못을 따져보고 새롭게 주어질 2016년에는 잘못된 길을 다시 가는 어리석음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의 길을 많이 수정했던 한 해였습니다. 잘 못 걸어왔던 길도 많았고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별 성과가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방향 전환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고 아주 작은 일까지도 철저하게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기를 많이 노력했습니다. 내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힘썼습니다. 특별히 의도적으로 많이 힘썼던 부분인 본문 2-3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2015년을 지나오면서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시면서 길다운 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길을 찾아서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잘 못된 길은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동물원 사육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펭귄과 사육사들 그리고 펭귄으로 공연을 하는 조련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남극의 신사’라고 불리는 ‘펭귄’은 날개를 헤엄치는데 사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펭귄 무리에는 이상한 펭귄이 있었습니다.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 펭귄이었습니다. 이 펭귄은 사람들과 얼마동안 지냈는데, 우연히 보게 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늘 그 거울을 찾아왔습니다. 짝을 붙여줘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사육사들이 그 펭귄을 자신의 무리로 돌려보내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지만 어느 샌가 다시 사람들의 세계로 와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자신의 애마를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김유신은 술을 즐겨서 자주 술집에 들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술집에는 천관이라는 여인이 있었고 김유신은 그 여인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아들에게 한 나라의 장군이 한낱 술집 계집에게나 정신을 파느냐고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깊이 깨달은 장군은 술집을 멀리했습니다. 어느 날 장군이 귀가하던 중에 말 위에서 졸다가 문득 눈을 뜨니 말이 천관이 있는 술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말은 그동안의 습관대로 그 길을 온 것입니다. 말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장군은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사랑하는 말을 죽였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잘 못 습관을 들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한 번, 두 번 자꾸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되면 자신의 인격으로 굳어버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풍속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망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이 욕망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복(福)만 추구하는 ‘기복주의신앙(祈福主義信仰)’이 됩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이 기복주의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4:22-24절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하나님을 따르는 새 사람이 되지 못하면 본문 3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잘못된 길을 찾아내어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도록 결단하고 마음과 행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에서도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야고보서 3: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시며, 6절에서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십니다. 말이 무섭고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봅시다. 마태복음 12:36-3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시며, 유다서 1:15절에서는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한 말 한마디가 스스로를 정죄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 욕설과 정죄하는 말, 억센 말, 자기 고집의 말 등. 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신실한 삶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요한일서 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가 마음과 뜻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쉐마라고 말하는 신명기 6: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22:3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전인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즉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실천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9: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즉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과 뜻과 행동이 각각 다른 것을 ‘거짓’혹은 ‘외식’이라고 하며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7-8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가 마음과 행동이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런 신앙을 조롱하며 경멸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도 이런 두 마음을 가진 교인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속담에서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고 했듯이, 시쳇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 있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2-3절의 말씀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마음의 품은 생각을 아시며 우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부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습니다. 주유소 직원은 기름을 주유하는 동안 차의 앞 유리를 닦아주었습니다. 주유소 직원은 부부에게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기름이 다 들어갔습니다.” 남편은 기름이 다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자동차 앞 유리가 아직 더럽다며 한 번 더 닦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얼른 알겠다고 대답하며 다시 앞 유리를 닦았습니다. 혹시 자신이 좀 전에 보지 못한 얼룩이 묻어 있는지 꼼꼼히 살피며 열심히 닦았습니다.
“손님 다 닦았습니다.” 직원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짜증을 내며 말했습니다. “아직도 더럽군요. 당신은 유리 닦는 법을 잘 모르나요? 한 번 더 닦아 주세요!” 그때였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남편의 안경을 벗겨갔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천으로 렌즈를 닦아 다시 씌어 주었습니다. 남편은 깨끗하게 잘 닦여진 유리창을 볼 수 있었고,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된 남편은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아마도 실화를 올려놓은 것 같은데,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이나 자신의 삶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절에서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2015년에 주어진 쉰 두 번의 주일 중 마지막 쉰 두 번째를 지내면서 혹시 한 해를 지내오면서 잘못된 신앙과 삶의 열정이 있었다면 버릴 것은 버립시다. 그리고 2016년에 또 다시 그런 삶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단절시킵시다. 잠언 26:1절에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시며, 베드로후서 2:22절에서는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확실한 믿음으로 재정립하여 2016년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바른 길로 나아가는 복된 출발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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