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영적 소신이 필요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593회 작성일 2016-04-12 22:50

*** 영적 소신이 필요합니다. / 디도서 2:15-3:8

디도서 2:15-3:8,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70억이 넘는 사람이 살지만 똑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지문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릅니다. 이들 모두는 각자 자신의 생각이 있고 자신의 주장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다르게 지으신 것은 각 사람에 대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 31:15절에서 욥은 “나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나눠주신 은사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영의 생명이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 흉내 내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영적인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아파트 근처에 있는 세탁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세탁소 전부를 태웠습니다. 며칠 후, 아파트 벽보에 ‘사과문’ 하나가 붙었습니다. 사과문에는 ‘불이 나서 옷이 모두 타버려 죄송하다는 이야기와 옷을 맡기신 분들은 옷 수량을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공고문 아래에 어느 주민이 글을 남겼습니다. 당연히 옷 수량을 적어 놓은 글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저씨! 저는 양복 한 벌인데 받지 않겠습니다. 그 많은 옷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기를 내세요.”
그 후로 아파트 주민들이 속속 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금일봉을 전했고, 금일봉이 전달된 사실이 알려지자 또 다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도 계속해서 도움의 손길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파트 벽보에 또 한 장의 글이 붙었습니다. 다름 아닌 불난 세탁소에서 붙인 ‘감사문’ 이었습니다.
“주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월남전에서 벌어온 돈으로 어렵게 일궈 온 삶이었는데,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이 저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저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 글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일어났던 미담이라고 인터넷에 올린 글입니다. 정말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세탁소 주인의 정직한 소신과 어느 주민의 따뜻한 사랑의 소신이 빗어낸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작은 소신을 나타내면서 살 때에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영적인 소신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소신은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목회자인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특히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그레데 섬 지역의 교회에는 유대 주의자와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단적인 신앙을 배격하고,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여 분별력 있게 영적인 소신을 가지고 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15-3:2절을 봅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신 있는 생활을 하도록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영적인 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3-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영적인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진정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즉 우리도 믿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어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영적인 소신을 가지고 살도록 강력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 영적인 소신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한양 가는 길목에 80리마다 신나무가 지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새 짚신을 신으면 80리 정도에서 해어진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짚신이 낡고 떨어지면 신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진 짚신을 신나무에 걸어 두지 않으면 발병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의 십자군 수칙에는 ‘해진 신발은 반드시 불에 태워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태우지 않고 버리면 악마가 신게 되어 자신에게 불행이 닥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말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의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낡아진 신발 처리하는 것을 두고도 동양의 의식과 서양의 의식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서양 사람은 쓰레기는 태워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절대 함부로 땅에 버리지 않지만, 동양 사람은 땅에 버리면 썩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의식화되면 공산주의 방식대로 살게 되고, 개인주의 사상에 물들면 개인주의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의식(意識)’이라고 하며, ‘소신(所信)’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이처럼 의식 곧 소신은 그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고 생활의 모양을 좌지우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없고 소신이 없는 사람은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정함이 없어서 하나님에게나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정함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렇게 영적이 소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의식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의식뿐만 아니라 소속과 신분이 다르고, 소망이 다르고, 영의 유무(有無)까지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12절에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차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 차별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본문 3-7절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의 말씀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된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생의 상속자 즉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없이 해왔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에서 하시는 것은 1-2절입니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세상 권세에 대하여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하는 것까지도 순종해야 하는가?’ 라는 것처럼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생활에서는 세상 권력에 순종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말을 막도록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3:3절입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았던 베드로전서 2:12절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선을 행하는 것과 2절 말씀처럼 비방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관용하고 온유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 즉 진정한 사랑의 삶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믿음의 소신을 따라서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은,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즉 ‘끈은 매일 다시 매어야 하듯,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매일 거듭 여며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여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면서 믿음의 소신을 따라 성실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소신이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한 여행자가 아주 황량한 광야 같은 지역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 하나 없는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그때 한 양치기가 보였습니다. 양치기는 양 30마리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3년 전부터 황폐한 그 곳에 홀로 양을 돌보면서 떡갈나무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도밤나무 묘목을 심고 습기 찬 골짜기에는 자작나무를 심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여행자는 군인으로 우연히 예전의 그 황폐했던 땅을 다시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황폐했던 그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름다운 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양치기가 그 동안 심어놓은 떡갈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환상의 숲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황폐했던 곳은 바로 지금의 남프랑스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다고 하는 프로방스 지방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나무를 묵묵히 심었던 양치기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입니다.

이 글을 쓴 여행자는 ‘장 지오노(Jean Giono)’이며, 그는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이 특별한 사람을 만났고, 그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아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실화이며 1953년에 처음 발표된 이후 미국 삼립협회 등. 지구재녹화운동 교육 자료로 꾸준히 보급되어 왔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영적인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적인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영적인 것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영의 삶은 육신의 삶을 포함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영적인 소신은 육신의 생활까지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영적인 소신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쓰며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조금 더 넓은 시선과 확고한 믿음의 소신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내가 다니는 직장과 사업장 그리고 사회와 환경을 바꾸어가는 능력의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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