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라고 생각 될 때
*** 시험이라고 생각 될 때 / 베드로전서 4:12-19
베드로전서 4:12-19,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생활하다가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까? 사람은 일평생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합니다. 이런 일을 만날 때면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욥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모양으로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시험이나 시련은 잘 견뎌내면 큰 유익을 얻게 됩니다. 야고보서 1:2-4절을 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나 시련의 시험이 다가올 때를 위하여 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흑인이 백인집의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사냥을 좋아하여 늘 흑인 하인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날도 사냥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주인이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늘 고난을 당하고 시험을 당했다고 하느냐?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도 없는데.”
하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시여, 노하지 마시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세요. 지금 저 앞에 보이는 꿩을 쏘아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한쪽 다리가 맞아 살겠다고 절름발이가 되어 달아난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것을 먼저 가서 잡으시겠습니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물론 산 놈을 따라가 잡을 것이 아니냐?” 그때 흑인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주인님은 이미 그 영이 죽었으니 마귀가 잡으려고 시험할 필요가 없고, 저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니까 마귀가 잡으려고 별별 시험을 다 할 겁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어려움과 여러 가지 시련의 시험이 주어지는 것은 내 영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더 나은 기회를 위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의 생활에서 예고 없이 다가오는 시험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베드로서신은 사도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들 지방은 남부를 제외한 소아시아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1:1)는 유대를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 즉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말합니다. 이들은 로마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점점 박해가 심해져 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종말의 소망을 재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해 중에라도 신앙을 지키며 올바른 생활을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특히 본문말씀에서는 고난과 시험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불 시험과 같은 신앙의 연단을 위하여 다가오는 시련을 인내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칩니다(19절).
※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처럼, 다가오는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에 대하여 대비를 한다면 위태롭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험’이라는 말은 성경에 크게 두 가지로 나옵니다. 먼저 출애굽기 17:7절을 봅시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시험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tes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충실한지, 신앙이 진실한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을 뜻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자격 심사’와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마태복음 4: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리고 또 한 구절 요한계시록 2:10절을 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며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에서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시험이라는 헬라어는 peirazo 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tempt 혹은 try 로 번역했습니다. 의미는 ‘시험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죄의 유혹’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test와 tempt 두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어는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시험은 ‘사람이 충성된 여부, 진실한 여부, 자격이 되는지 여부 등을 알아보는 시험인 시련’과 ‘죄에 빠뜨리기 위한 시험인 유혹’의 경우가 있습니다. 시련은 연단이라고도 하는데 더욱 큰 은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용한 것입니다. 욥에게 허락된 경우입니다. 욥기 1:8-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러한 시련은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런 시험은 이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런 시련이 다가올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하며 반드시 이겨내야 합니다.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욥은 시련을 잘 이겨내어 시험 이전 재산의 배를 더 받았습니다.
혹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하는 유혹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마태복음 24: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만일 이러한 유혹에 빠지게 되면 영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누가복음 22:3-6절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사탄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시험은 이겨야 할 것도 있고 거부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시험은 ‘시련’즉 자격심사를 말합니다. 자격을 검증하는 시험은 당연히 맞서서 이겨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시험이 부담스럽고 힘들어서 피한다면 그는 평생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겠지요. 본문 12-14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금속을 녹이는 것과 같은 무서운 불 시험이 올 때에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자격을 검증하는 시련을 잘 이겨내면 신앙은 한 단계 성장하게 되고 그에 걸맞은 은혜와 복이 주어집니다. 마치 신앙의 영적 승진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야 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미혹하게 하는 죄의 유혹은 맞서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고 피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구원파 이단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서 맞장토론까지 벌였는데 어느 날, 그는 교회를 떠나 이단에 빠져버렸습니다. 사탄은 담대하게 대적하고 싸워야 합니다. 본문 아래의 5: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을 신앙에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돈, 직장, 명예, 자녀, 레저, 스포츠, 쾌락, 이성, 자신의 욕망 등등. 이런 것은 강력하게 거부하고 피해야 합니다. 사탄과 싸운다는 것은 칼과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들의 유혹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일 조금만 호기심을 보여도 사탄은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2:20-22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이처럼 죄의 유혹은 강한 결단력으로 단칼에 베듯이 끊어버리고 거부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혼란 그 자체입니다. 어이없게도 신천지 이단이 거리에서 대대적으로 기독교 방송사인 CBS와 기독교 연합인 한기총(한국기독교 총연합) 해체를 부르짖으며 서명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동성결혼, 군 동성애법, 차별 금지법, 스쿠크 법(무슬림), 할랄식품단지(무슬림), 종북 좌파, 신천지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 JMS 등 수많은 이단들. 정말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힘에 버겁도록 어려운 불 시험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믿음으로 대비하는 자만 이길 수 있습니다. 육신이 사는 일에 정신 빼앗겨 하나님 나라를 잃으면 안 됩니다. 영적인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유대인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한 편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지나는 마차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리가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예루살렘까지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답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30분 정도가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그러자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인생길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조금 늦더라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빨리 가도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때때로 어려운 시련으로 인생길이 힘들고 더디게 여겨져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면 목적지인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혹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된다면 더 늦기 전에 결단하고 바른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유혹으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으로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내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