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가 바라보는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940회 작성일 2016-06-01 22:59

*** 내가 바라보는 것 / 골로새서 3:1-6

골로새서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몇 개월 전에는 같은 본문말씀으로 ‘행복을 누리십시오.’라는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내 삶의 방향’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삶의 방향이란 자신이 나아가는 길이며, 자신의 삶의 관점이자 목표입니다. 이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어느 방향으로든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설령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치반이 없는 배가 바다 가운데서 표류하듯이 인생을 표류하더라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자신의 관점과 목표가 뚜렷한 삶의 방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의 육신적인 삶의 방향은 물론이거니와 영적인 방향도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건축공사현장을 지나다가 흥미로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인부들이 리어카를 쳐다보며 밀고 가는데, 한 인부는 앞에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학자는 앞에서 끌고 가는 인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레를 보면서 밀고 가는데 왜 당신만 끌고 갑니까?”
그러자 그 인부는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수레를 하도 밀고 다니다보니 꼴 보기 싫어서 그러네요.”
그 순간 심리학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은 늘 수레만 봐야 하고 무거운 짐만 봐야 하지만,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은 앞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수 있고, 하늘과 땅,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야!”

여러분은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1:8-9절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자기 인생, 자신의 일, 자기 짐만 보는 사람은 더 큰 세상도 더 큰 희망도 아름다움도 보지 못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배로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늘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은 어떻습니까? 지금 어디를 향하여,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 인생의 방향설정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느 성장하고 있는 교회에 오래 동안 목회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목회 사역을 내려놓았습니다. 놀란 그의 친구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살지 못했거든!”
친구는 충격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찾으며 자신으로서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목회할 때 목회자답게 보이려고 목회자답게 행동하고 목회자답게 살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진정성 보다는 권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내적으로 죽어가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 신학생으로 부교역자로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는 나 자신을 솔직하게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갈라디아서 1: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씀처럼 목회자로서의 삶의 방향설정이 잘 못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며,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든지 교회에서는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목사님만 아니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조차 가식적인 삶의 가면, 가식적인 인격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리고 갈라디아서  6:7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자신이 설정한 삶의 목표와 삶의 길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곳, 자신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이 ‘위’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ano’라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Which are above’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그대로 ‘위치적인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위의 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내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내 인생의 삶의 방향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살면서도 위의 것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를 본문 3-4절에서 밝힙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비록 우리 육신은 땅에서 살면서 땅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마저도 거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따르는 삶은 죽었으며 지금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처럼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하나님 자녀의 삶이 되어야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영원한 영광의 삶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은 어떠합니까?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 말을 들은 부스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발에 동상이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약2:15-17).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라는 그림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성 바울 대성전’입니다. 그 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부스 장군의 물음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삶’을,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과 방향을 잃어버린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본질과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5-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씀은 먼저 잘못된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는 것입니다. “죽이라.”는 표현은 ‘확실하게 버려라.’는 뜻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음란’인데, 잘못된 성적인 쾌락과 우상숭배를 뜻하며, ‘부정’은 불결한 행위, ‘사욕’은 색욕과 지나친 사랑을, ‘악한 정욕’은 타락한 갈망 또는 금지된 욕망을 뜻하며, ‘탐심’은 탐욕 즉 사기, 강탈과 같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8-9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이런 것으로부터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고 비어진 자리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 삶이 12-17절까지에서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은 ‘예수님의 품성을 닮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신앙이론보다는 사랑으로 행하는 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행실로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해야 하며, 용서하고 이해하고 베풀고 돕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절을 봅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말씀은 철저한 순종, 즉 실천적인 삶을 전제로 합니다. 오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는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진정성’입니다. 외식적, 가식적인 말과 행동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진정성입니다.

자신의 가식을 벗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까마귀가 아무리 다른 새의 깃털로 자신의 검은 깃을 가리더라도 까마귀일 뿐이며, 당나귀가 아무리 사자인척 흉내를 내도 그 목소리는 ‘으흥’이 아니라 ‘히힝’하는 당나귀 소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17절에서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가가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그리고 2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높은 자리에 있든지 낮은 자리에 있든지,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그 어떤 자리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알고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옛말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자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헌금 많이 하고, 남을 많이 돕고, 많이 베푸는 것이 부럽다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면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은사를 주셨고 그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지 않으신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8: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과부의 두 랩돈처럼 가난하지만 자신의 것을 다하여 드리고, 베풀고,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우시며 기쁘게 받으시는 행복이 따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아프게 해드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아픈 것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쁨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은 말로 해서는 믿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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