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우물안 개구리 신앙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032회 작성일 2016-05-25 21:29


*** 우물안 개구리 신앙 / 요한복음 4:27-35

요한복음 4:27-35,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들어가는 말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은 중국 고사인 ‘장자’에 나오는 말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이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짜 하늘을 설명할 수 없듯이 이런 사람에게 더 크고 더 위대한 세상을 말해 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여름만 살다가는 여름곤충에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 대하여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즉 한 쪽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묶여 살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 고사를 통하여 세 가지의 집착과 한계를 뛰어넘도록 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뛰어넘어야 하며, 두 번째는 자신이 사는 시간을 뛰어넘어야 하고, 셋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즉, 우물 안의 개구리는 ‘공간’에 구속되어 있고, 여름벌레는 ‘시간’에 걸려 있고, 지식인은 ‘지식’의 그물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라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이 가사도 ‘좁은 공간에 갇혀서 우물쭈물하는 소심한 신앙을 떨치고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바다로 나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믿음이 약하여 소심한 신앙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세계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고 잘 되고 싶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자신의 좁은 신앙세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이야기와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이적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의 예수님 사역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56Km지점에 위치한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수가는 사마리아 한 가운데의 성읍으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세겜’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다가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수가 성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족속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 왕이 빈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민족을 이주시켜서 혼혈이 되게 했습니다. 만일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복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은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려면 광야 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 곳을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하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래서 본문 앞쪽의 9절에서 수가 성의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이 수가 성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 가에서 예수님 일행이 잠시 쉬면서 음식을 먹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고, 그 사이에 예수님은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일을 말하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권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음식이 있다 하셨고, 멀리 마을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육신적인 음식, 세상적인 이치를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추수의 때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 자신의 시각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수가 성을 방문 했을 때가 유대력으로 12월경이었습니다. 이 때는 밀과 보리를 파종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들판을 보았을 때는 추수를 하려면 아직 넉 달이 더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에 수가 성 여인에게 뿌린 복음의 씨앗이 지금 추수를 할 때가 된 것을 보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이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전했고 그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우물 가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환경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시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시각과 관점을 아는 것입니다.

자살을 수차례 시도했던 어느 성도의 고백입니다.
“막 자살을 하려는 그 순간, 비로소 나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느끼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내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극한의 고통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 안의 텅 빈 가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과 만남도 없이 그저 혼자서 울고 있는 나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내가 부르는 하나님은 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죽은 하나님일 뿐,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로마서 8:5-6절을 봅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느낌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단 1%도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지금 확인하십시오. 앞의 성도의 고백처럼 자신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고난을 만났을 때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대충 적당한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정도 신앙생활이면 되겠지!’ 이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신앙입니다. 먹고 사는 세상의 일에만 관심두지 말고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영적인 시각에도 관심을 가지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영적인 시각을 가지라는 요청입니다.

※ 우물 안의 개구리 신앙을 벗어나려면 우물에서 나와야 합니다.

앞서 읽었던 로마서 8:5-7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삽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예배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지만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교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능력을 전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열대의 뜨거운 한낮의 열기에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지쳤습니다. 앞의 6절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여섯 시면 정오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한낮의 여행에 지치셔서 잠시 쉬면서 물과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수가 성 우물가에 멈추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구해 와서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의아해 할 때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수가 성 여인을 만나서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하여 수가 성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향하여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음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즉 영을 새롭게 하고 새 힘을 공급하는 것은 세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도무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기를 바라시며 영적인 세계를 열어 가십니다.

여러분, 영적인 도약을 원하십니까? 육신의 삶의 새로움과 능력을 원하십니까? 우물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상상 속의 신앙에서 떨치고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모두가 쉬는 그 정오의 뜨거운 열기에 왜 우물에 왔습니까? 이는 자신의 더러운 생활이 부끄러워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물을 길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여인은 그 즉시 자신의 우물 안에서 떨치고 나왔습니다. 부끄러워서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한낮에 물을 길으려 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조차 다 드러냈습니다. 본문 28-29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것이 자신만의 우물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이심을 확신할 때 자신의 생각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서 살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자신의 시각이 육신적인지 영적인지 확인이 됩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해변의 찰싹거리는 잔물결이 무서워 아직도 세상에서 망설이고 있습니까? 자신의 교회생활에 만족하면서 천국을 꿈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자신의 우물 안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더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다시 오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서 마음껏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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