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삶의 고통으로 인한 유익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755회 작성일 2016-05-18 23:07

*** 삶의 고통으로 인한 유익 / 고린도후서 12:6-10

고린도후서 12:6-10,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들어가는 말

미국 캘리포니아 주 포트 브랙 (Fort Bragg)에는 아주 특별한 해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변에는 백사장이나 자갈이 펼쳐져 있지만 이 해변에는 수많은 형형색색의 유리구슬로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해변의 이름이 유리 해변(Glass Beach)입니다. 이 아름다운 해변의 유래는 이러합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캘리포니아 포트 브랙(Fort Bragg)에 사는 주민들은 생활 쓰레기를 해안의 절벽 아래로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해변에는 깡통, 병, 박스, 집안 쓰레기들이 쌓여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변은 엄청난 쓰레기 산으로 변했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그제야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깨달은 주민들이 쓰레기 버리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당국은 1967년 이곳을 폐쇄하고 수차례 쓰레기 정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회복할 수 없도록 망가진 해변은 처참한 몰골이었습니다. 그 후 그 해변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고 40년이 지났습니다. 그 40년 동안 보기 흉한 쓰레기들은 바다로 씻겨 떠내려갔습니다. 바닥에 가라앉은 유리병과 도자기들은 파도에 잘게 부서지고 모래와 자갈에 이리저리 굴리면서 동글동글하게 갈아졌습니다. 파도는 이렇게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을 다시 해변으로 밀어 옮겨놓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유리구슬 해변(Glass Beach)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곳 ‘유리해변’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이 만화경 같은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유리해변의 역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서두에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포트 브랙 해변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보기 위한 것입니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쓰레기들을 40년 동안 파도와 모래와 자갈들이 옮기고 굴리고 갈아서 명품 해변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지고 거친 환경과 고난의 길을 통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신명기 8:2-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이라는 길을 통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삶의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썼으며, 그 후에 디도를 고린도교회에 보내어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가서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 그 상황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기뻐할 일은 첫 번째 편지를 통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하고 또 바울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있었는데,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온갖 비난과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하며, 탐욕스럽다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언어태도까지도 문제시 했습니다(10:1).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썼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보았고 주님을 만났던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론이며, 또한 엄청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육체의 큰 고통도 주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8-9절에서 증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 삶에 주어지는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복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교인들이 기복신앙, 번영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잘 되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버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역자들이 이런 교인들의 마음을 맞추려고 그런 싸구려 신앙을 전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셨다면 이런 내용이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난과 고통만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이란 이런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요한복음 15:18-20절을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이 말씀은 내가 따르는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전부라면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주님을 진실하게 따름으로 인한 고난과 고통에는 너무도 확실한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 삶의 고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사도 바울이 표현한 “육체의 가시”같은 생활이나 육신의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습니까? 어려움과 고통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다만 우리가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19:71절에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이 당한 고통에 대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장미에서 추출하는 장미오일인 ‘로즈향수’라고 합니다. 이 향수는 발칸산맥(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채취합니다. 장미의 향기가 언제 가장 진하게 풍기는지 아십니까? 자정에서 2시 사이라고 합니다. 향수를 만들기 위하여 따는 장미는 바로 이 시간에 채집한다고 합니다. 장미는 이 한밤중의 짧은 시간에 가장 짙고 많은 양의 향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햇빛이 비취는 낮에 따게 되면 장미향이 40%밖에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빛이 없는 캄캄한 밤. 모든 식물이 활동을 멈추는 차가운 공기가 있는 한밤중에 장미는 가장 짙은 향기를 발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미는 거름기가 없는 박한 땅에서 자라야 좋은 꽃을 피우고 향기가 더욱 진합니다.

항상 안전하고 따뜻하며 넉넉한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는 온실에서 자라는 꽃들은 본연의 진한 향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국화차가 있는데 일반 국화차보다 향기나 우러나는 색깔이 많이 다릅니다. 이는 히말라야의 3000미터 이상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국화라고 합니다. 그 힘겨운 생존환경을 견디느라 짙은 향기가 나나봅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닥치는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이 사람을 단련시켜서 진실한 인간미와 진한 품성을 형성하게 합니다. 앞의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진정한 섬김의 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No cross No crown!', 이라고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적인 고통은 간질 혹은 안질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고통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오히려 그 고통을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모든 고난이나 고통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죄가 원인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분은 자신이 고통 받는 일의 목적을 살펴보면 됩니다. 자신을 위한 일이나 혹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다가 받는 고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15-16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본문말씀처럼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에게 오해와 비난의 고통까지 겹쳤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고통의 원인과 목적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복음을 전하다가 혹은 주님의 일에 헌신하다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과 봉사의 삶을 살다가 받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처럼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욕망이나 잘못으로 인한 고통은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회복되고 살 수 있습니다.

※ 주님으로 인한 고통은 큰 유익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헨델’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작곡한 ‘할렐루야’는 왕이 연주를 듣다가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를 담고 있는 유명한 곡입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했고, 남의 돈을 빌려서까지 치료하려고 애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불후의 명작인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이 바로 이 감옥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네 번이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뿐입니다. 1932년에 대통령이 되어 1945년 죽을 때까지 사대에 걸쳐 대통령 직을 수행했습니다. 그 역시 소아마비로 지체가 부자유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초강대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헨델이나 루즈벨트나 비록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비록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고통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애가 3:33절에서,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에게 왜 이런 고난과 아픔과 같은 인생의 가시를 주셨겠습니까? 시편 119:7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4:1-2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나 고통은 좌절하거나 시험에 빠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강함으로 덧입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주어지는 고난이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평이나 원망 나아가서 좌절이나 후회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 나타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람의 절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도 있듯이, 고난과 고통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보다 더 위대하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고통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기쁨과 행복과 승리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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