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
*** 내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 / 에베소서 4:1-3, 11-16
에베소서 4:1-3, 11-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 시대의 상호 신뢰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번 총선을 보면서 사람들의 신의가 정말 허무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히브리서 13:9절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5:8절에서는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십니다. 마음은 환경과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숨 쉬면서 하는 말이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올곧은 마음으로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은 ‘누구를 따르고 무엇을 따르느냐?’는 것이 중요하며, 마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믿음의 길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을 사는 에베소 교회에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직분을 통하여 믿음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내용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와 직분의 목적을 가르치십니다. 본문 12절 말씀처럼 ‘영적인 은사와 직분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함으로써 서로 돕고 연결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 즉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특히 세상 학문이 아닌 하나님을 가르치고 영의 생명과 삶의 길을 가르치는 일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가치 있고 참된 교육이 곧 기독교 교육입니다. 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으로의 길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0: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기독교 교육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직분자를 세우십니다(본문 11-12절). 왜냐하면 영에 속한 것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특별한 은사가 필요하며, 그러한 은사를 받은 직분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 혹시 ‘강뉴 부대’가 어떤 군인들인지 아십니까? 강뉴부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부대의 이름입니다.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에 침략당했을 때, 힘이 없어 이 세계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조국을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뒤에 두고, 대한민국을 향한 군함에 올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1951년 4월 13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Janmeda 광장에서는 비범한 출정식이 열렸습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돕기 위해 에티오피아 최강의 강뉴부대를 한국으로 파병하기 위한 출정식이었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출정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이렇게 6,039명이 참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고 253번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한 번의 패배도 없이 253번의 값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승리에는 희생도 함께했습니다. 전사한 전우가 있으면 밤새 그 주위에 모여서 다 함께 울었다고 하니 그들이 겪었을 그 참담함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에티오피아는 7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자원했던 강뉴부대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를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 중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돼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는 일을 인터넷의 ‘따뜻한 하루’라는 좋은 글을 전하는 단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월에 여러 회원들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여 아직 생존한 244명의 강뉴부대원들 중에서 210명을 만나서 후원금과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 지구촌의 작은 나라 에티오피아, 그들 중에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작은 나라의 자유를 위하여 자원했던 사람들. 이들이 그렇게 강력한 전투력으로 싸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적인 자신의 신념이었지만 자신의 믿음의 길이었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를 위하여서 그렇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강뉴부대처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마치 강뉴부대를 출정시키는 셀라시에 황제의 명령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길은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자세는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품은 생각은 이미 행동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리고 요한일서 3: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21-23절에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려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말씀으로 다스리지 못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따라야 하는 믿음의 길은 본문 13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즉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길’이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는 것인데 즉 예수님을 온전하게 닮는 삶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이르도록 믿음이 온전하게 성장해야 합니까? 그것은 14절의 설명처럼 너무도 당연히 세상의 유혹 즉 사탄의 술수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두 가지 조건을 봅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를 이루는 것’ 즉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믿음과 지식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중요한 두 요소의 결합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가르침을 통하여 성숙되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이 두 요소는 따로 따로 개별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어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소유한 사람은 가슴이 뜨거워서 열심을 낼 수는 있지만 쉽게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비적인 신앙을 추구하다가 이단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많이 가진 사람은 이론에 밝아서 매사에 따지려고만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처럼 많이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믿음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 몸에서 피가 온 몸을 돌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16절을 봅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처럼 온전한 믿음의 성장은 전체가 고르게 자라야 가능합니다.
어떤 청년이 사모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여러 달을 애태우며 거듭 구애를 했건만, 번번이 퇴짜만 맞아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애는 계속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이윽고 여인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청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토록 사모하던 여인 곁에 앉았습니다. 청년은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무더기 꺼내어 여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썼던 전해주지 못한 열렬한 연애편지들이었습니다. 청년은 편지를 여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당신을 사모했고, 만나고 싶었고, 사랑했는지 모른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건만, 청년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결국 여자가 말했습니다.
“참, 별 바보 같은 남자 다 보겠네. 그 편지는 모두가 당신이 저를 갈망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 아녜요? 그런데 보세요. 지금 여기 당신 곁에 제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계속 그 편지나 읽고 있으니, 대체 어찌 된 거예요!”
그러고는 횅하니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들었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웬만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지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계속 머리를 굴려가며 궁리하고 입으로만 말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길은 알고 있지만 선뜻 그 길을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기쁨과 평안,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늘 힘들고, 삶에 기쁨이 없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똑 같은 고민에 싸여서 삽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4: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맛보아 안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의 경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믿음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론적으로 공부하거나, 머릿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The Lord라고 부르며, 요한복음 14: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고 아는 것을 자신의 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온전한 사람의 길로 나아가면서 함께 하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직분을 주셨습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지체를 세워가면서 함께 가는 길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하셨는데, 신앙의 성장은 예배만 참석하거나 혼자 성경을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더욱 굳건하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내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을 바르게 잘 따라서 서로를 세워가면서 예수님께 이르는 온전한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참된 복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