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마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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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8-13 22:44
*** 온전한 마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 마태복음 22:34-40
마태복음 22:34-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 구원받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예전에 학생들과 청년들을 지도할 때면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니, 믿는 것이 참 쉽습니다.”라는 말을 간간이 듣습니다. 성경에서도 사도행전 2: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고, 16:31절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쉽게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 말이 틀렸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2:38절에서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구원의 조건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게 되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9:2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신약시대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한 구절을 더 봅시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들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거룩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부담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지지요?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예전에 어떤 분들이 그러더군요.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시달리다가 교회에 왔는데 부담스러운 말씀보다는 위로의 말씀, 평안의 말씀을 주시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복 받으라.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해서 그렇게 된다면 날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안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말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며 오히려 생명을 잃게 하는 거짓 목회자입니다. 에스겔 13: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들이 아니라.” 10절입니다.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지금 내가 복 받고 마음 편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좋은 말을 듣고 마음이 좋다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을 쓰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민과 근심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근심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 안에 머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온전함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말씀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이 말씀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은 ‘온전함’입니다. 온전한 헌신, 온전한 예배, 온전한 섬김 등. 하나님께 관계된 모든 것은 ‘온전하고 완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부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각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음이라.” 이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내 삶이나 내 마음의 일부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온전함’이라는 단어는 ‘완전함’ ‘부족함이 없는’ 등의 의미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풀이한 내용이 본문말씀입니다. 즉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의 삶입니다. 이 온전한 사랑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던 중에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이 말은 프랑스어로서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말이 생겼고, ‘닭에게 맡겨진 임무가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말을 ‘사회의 지도층이 갖추어야 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데 사용합니다. 곧 ‘노블레스’는 권력이나 부(富) 또는 명예를 가진 귀족층을 말하고, ‘오블리제’는 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14세기경 프랑스 칼레시(市)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치르는 중이였는데, 프랑스의 칼레 시는 영국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었습니다. 칼레시민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항전 했지만 결국에는 전투에 패해 백기(白旗)를 올리고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왕은 ‘항복의 조건으로 칼레시민 8명을 본보기로 처형하겠다.’고 했고, 칼레 시는 전체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여섯 명의 사람들이 의연하게 교수대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들은 칼레 시의 시장과 법률가 그리고 그 도시의 최고 부자들이 포함된 칼레 시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복한 영국의 왕은 처형을 취소하고 모든 시민들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칼레 시의 경우처럼 사회적인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공동체를 위해 재산과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담고 있는 말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입니다. 저는 이 말을 영적인 삶에 적용시켜보면서 ‘영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의 전적으로 헌신된 삶이다.’라고 정의를 내려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섬김과 헌신입니다. 즉 내가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에 대하여는 조금 아래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예배를 예로 들어 봅시다. 예배를 의미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아바드’라는 말인데, 영어의 service 개념을 가지고 있는 ‘봉사’,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단어로는 ‘솨하’라는 말인데, ‘엎드리다, 굴복하다.’는 의미로, ‘숭배’, ‘순종’, ‘섬김’ 등의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프로스‘~에게’와 퀴네오‘입맞추다.’의 합성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종이 주인에게 문안할 때 존경의 표시로 머리를 조아리며 발에 입 맞추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단어로는 ‘종으로서 섬기는 것’을 뜻하는 ‘라트레이아’라는 말도 있습니다. 영어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 ‘worship’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말들을 종합해보면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에 합당한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에 대한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예배는 전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과 거룩함과 온전함으로 순종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7절처럼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온전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반드시 알고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6-7절을 봅시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레미야 29: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여 온 마음을 집중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에 있는 수십억명의 신자들이 기도하겠지만 하나님께로 올려지는 기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만 하나님께 이르게 됩니다. 야고보서 4:2-3절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 기도에 대한 말씀은 수없이 많지만 이 말씀들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할 것이며, 하나님께로 온 마음을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저도 이렇게 기도하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그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뇌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떤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들기도 하고, 입술은 찬송을 하는데 마음은 다른 것을 생각하며, 귀는 말씀을 듣지만 마음은 다른 것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예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기도, 찬양, 말씀 등 어떤 것도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기도를 방해할만한 것들을 다 정리하고 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이나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모든 환경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화기를 꺼두는 것,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다른 계획들이 없을 때, 심지어는 생리적인 현상까지도 미리 해결해 두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새벽이나 모든 일이 다 끝난 저녁시간이 집중하여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또 하나, 온전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것은 ‘헌신’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잘 아시는 대로 'fellowship' 즉 ‘제자도’로써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본문 39절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아들의 아버지이자 기도의 사람인 ‘조지 뮬러’ 목사의 전기를 썼던 ‘피어선’ 박사는 뮬러의 헌신적인 생애에 감동을 받아 어느 날, 뮬러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성자처럼 위대한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까?” “박사님, 나 조지 뮬러는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었다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박사에게 뮬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죽었던 사람이란 자아(自我)를 말합니다. 고집과 교만함, 이기주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것을 말합니다. 나는 조지 뮬러가 아니랍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조지 뮬러 목사님도 이 고백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에서 하나님께 큰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5:5절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역대하 15:15절에서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17절에는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이 말씀은 남 유다의 3대 왕인 ‘아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따르면 하나님의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향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 풍성한 은혜로 채우십니다.
오늘 드린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죄가 되고 불순종이 됩니다. 하지만 실천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들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을 아시고 도우십니다. 히브리서 12:1절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응원하며 함께 하는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함께 하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