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427회 작성일 2019-07-16 16:12
***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 / 로마서 7:21-8:6
 
 로마서 7:21-8:6,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들어가는 말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상담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욕먹을 짓만 골라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장난만 치고, 함부로 말하고, 도움이 될 만한 진지한 말은 웃어넘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마주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 되긴 틀렸다.’고 하는 청년이었는데 이 목사님이 불러서 조심스럽게 훈계를 시작했습니다. 인생과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만드신 목사님이 청년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전달했습니다.
“난 우리가 천국에서 서로 못 만나게 될까봐 몹시 두렵네!”
목사님의 진지한 표정과 말을 듣자 청년의 표정도 생전 처음으로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진심어린 목소리로 목사님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대답 했습니다.
“목사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셨기에 그러세요? 제가 뭘 도와 드릴까요?”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잘 분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못된 사람도 자신이 못된 사람이라는 것은 인식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경험하시지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욕하는 사람이 자신도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 합니다. 옛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너 자신을 알라.”고 했겠습니까. 인간세상 학문의 최고봉을 철학이라고 하는데 철학의 기본이 ‘인간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듯 하지만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 병법에도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고 했으며, 사서(四書)의 대학(大學)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싸움이 바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앞쪽 18-19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이어지는 본문 23-24절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싸움이며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입니다.
 
※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가장 외로운 싸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에는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자성어에도 ‘고장난명(孤掌難鳴, 외손뼉은 울릴 수 없다.)’이라고 해서 ‘혼자서는 일을 이루지 못하거나, 맞서는 사람이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과의 싸움’은 싸움의 대상이 자기 자신입니다. 이 싸움은 매일같이 일어나며,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스스로의 싸움이기 때문에 가장 외로운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거장인 사도 바울 조차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이러한 탄식과 고민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의 차이에서 오는 싸움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사람들보다 영적 싸움이 하나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3절에서 말한 싸움은 영적싸움입니다. 이러한 자신과의 내적이고 영적인 싸움에서 사람들이 때로는 착각이나 망상으로 스스로의 삶을 어두움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루전(불어로, 일뤼지옹, illusion, 환상, 착각, 망상 등의 의미이며,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지각하는 작용 및 그 형상을 일컫는다.)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 귀부인은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게 되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루전의 표현처럼 사람들은 화려한 외적인 가꿈과 스펙(SPEC, Specification, 기기나 시스템의 성능 제반)으로 추한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미국의 목사이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 미국 사회학자, 목사, 작가이며, 빌 클린턴 전 미국 영 보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이 말처럼 사람들은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만일 지금의 내 행동이나 삶이 미래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보다 신중해지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매일 우리의 미래의 자신들에게 좋거나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결정들을 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매일 하던 운동을 오늘 한 번만 걸러볼까?’라든지, ‘어떤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 한 번의 결정이 자신의 미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를 모르는 채로 말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릴 때에 작용하는 것이 자신의 영적인 관점입니다. 본문 5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사도행전 5:1-11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등장합니다. 초대교회가 한창 뜨겁게 부흥할 때의 일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그 드려진 재물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의 일부를 감추고 아나니아가 나머지를 베드로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속이고 있음을 알고 책망하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 다음의 일이 7-9절에 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하니 이르되 , 이것뿐이라.’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가리라.’하더라.” 이들 부부는 각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 하나님을 속였고, 자신의 결정에 대한 보응도 따랐습니다. 이들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에 대하여 거짓, 위증, 기망, 시기, 탐욕, 비방, 질투, 희생, 섬김, 배려, 도움 등의 스스로의 결정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결정과 실행에는 자기만의 내적이고 영적인 싸움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민하고 주저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외로운 싸움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싸움에서 영의 삶을 우선하는 결정을 하든지 육신의 소욕대로 결정하고 따르게 됩니다. 본문 아래쪽의 12-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은 우리 싸움의 결말에 대한 무서운 보응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비록 외로운 싸움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는 반드시 영적인 승리를 해야만 합니다.
 
※ 내가 반드시 이겨야 할 영적인 싸움의 유일한 길
 
사람들은 참 변명을 잘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변명의 대가(大家)가 있는데 사무엘상 15:13-15절을 봅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하니라.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 15:3)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각 왕과 짐승의 좋은 것을 죽이지 않고 남겨 왔습니다. 이것을 책망하자 사울이 백성들을 핑계로 변명했습니다. 이 변명은 20-21절에서 이어집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변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과 불순종 이 둘의 결과뿐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했다면 환경과 여건,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회개하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요한일서 1:9-10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은 전혀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환경과 상황, 여건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변명은 하나님을 탓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세상을 생각해봅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눈비와 바람과 햇볕을 받고 자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비록 환경과 여건과 모든 상황이 같아도 향나무는 향나무로, 과일나무는 과일나무로,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로 자랍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이 나 상황이 나무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환경이나 상황이 그 사람의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 역사도 이 일을 증언합니다. 경건한 유대인 혈통에서 태어나 그리스도인이 된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되었고, 공산 독재자 ‘스탈린’은 신학교 시절에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요한 웨슬레’와 ‘프란시스’ 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좋은 환경이라고 좋은 신앙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나쁜 환경이라고 나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7:25-8:2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결국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적싸움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모든 삶을 영적인 관점에 두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영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영적인 싸움은 나 자신 안에서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지게 되면 앞서 보았던 12-13절의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 영적인 싸움은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일어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싸움의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며, 지원군의 통로가 되는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빼앗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시간이 없습니까?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까? 그렇게 되면 여러분 자신의 영적인 싸움은 육신을 따르는 삶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7-8절 말씀(“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시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처럼 되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사모한다면 매일 매 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영적 싸움에 관심을 가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이 달린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여 주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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