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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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6-05 14:51
*** 우리,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 빌립보서 2:5-11
빌립보서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들어가는 말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송이 아빠는 취기가 있는 날이면 늘 쭈그러진 사과를 사옵니다. 송이 엄마가 ‘어디에서 샀느냐?’고 다그치자 송이아빠가 말했습니다.
“알고 사는 거야. 맨 정신에 그런 사과를 어떻게 사겠어. 팔고 싶어 내놓았을 텐데 누군가 그 사과를 사주지 않으면 그가 그 사과를 먹어야 해. 우리에겐 쭈그러진 사과지만 그 사람에게 밥이야. 그리고 밥은 생명이고,”
사과를 파는 분은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다니던 교회의 성도들의 도움으로 리어카를 구했고 그렇게 자그마한 과일가게를 연 것입니다. 송이 아빠는 그 사정을 알고 일부러 팔기 어려운 사과만을 골라서 사 준 것입니다.
이해와 배려의 마음! 참 따뜻한 말이지요?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에서 소외받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라도 그의 목마름을 위해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랑의 배려를 뜻합니다. 이런 작은 사랑의 배려도 주님이 기억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35-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심판의 광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사랑은 크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하는 작은 배려임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0-12)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4:7-8절에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재림의 때가 도둑같이 올 것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준비해두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때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내용은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 간의 사적인 교제와 교훈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말씀부터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바울은 본문 앞쪽의 선행구절인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서로 돌아보는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을 시작하는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즉 자신을 낮추고 서로 돌아보는 생활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의 본을 따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의 본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도 남을 위한 배려와 이해로 사랑을 나타내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아 따르면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더 크고 놀라운 영광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앞서 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그 삶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의 첫 번째 모범은 겸손의 삶입니다.
본문 6-7절을 봅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꼽았습니다. 그 첫 번째 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자신을 낮추신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렇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앞쪽에서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내용을 말씀했습니다. 2-4절을 봅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즉 ‘이해와 관용으로 서로 낮추고 남을 낫게 여겨서 한마음이 되고, 배려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80년대 어느 시골 마을에 이웃한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농부는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농부는 불신자(不信者)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논은 물길이 가까이 있어서 항상 물이 고여 있도록 된 논이고, 불신자의 논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밤중에 몰래 그리스도인의 논에서 물을 빼서 자기 논에 채웠습니다. 아침에 논에 나간 그리스도인 농부가 자기 논의 물이 다 빠지고 옆의 논에 물이 차있는 것을 보고는 그 불신자 농부에게 따졌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자기가 물을 끌어간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흘러 들어온 거라고 잡아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가 나서 밤에 몰래 불신자의 논에서 물을 자신의 논으로 퍼 올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영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연히 취할 권리를 취했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것만 주장하느냐? 왜 네 논의 물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스스로 물을 대주지 못하느냐?”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다음날, 그리스도인 농부는 자기 스스로 자기 논의 물길을 터서 불신자의 논에 대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나왔던 불신자는 이미 자기의 논에 물이 가득히 차 있는 것을 보고 금방 그 영문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음날 불신자 농부가 그리스도인 농부를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고 그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농부에게 ‘이해와 배려’라는 사랑을 처방하신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주 이런 종류의 일들을 겪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믿지 않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들이 감동을 받겠습니까? ‘전도지를 주고’ ‘예수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전도지에 사탕을 끼워주고, 어떤 말로 해도 오늘의 사람들은 오히려 식상해할 뿐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에 빠져서 서로 대화하는 것, 편지하는 것, 따뜻한 포옹 이런 감성적인 교류가 단절되면서 마음이 굳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아이들도 어른들도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사랑 고픈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관용하고 따뜻하게 배려해주는 것에 감동합니다. 실수한 사람을 이해로 덮어주고, 나와 뜻이 다른 사람도 관용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고 순서를 양보하는 등. 사람들은 의외로 별것 아닌 작은 것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감동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겸손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첫머리인 마태복음 5:16절에서도 그 뜻을 보이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러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결국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영광을 입게 하십니다.
※ 예수님의 두 번째 모범은 순종입니다.
본문 8절을 봅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꼽았습니다. 그 두 번째 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입니다. ‘순종’이라는 주제는 설교의 단골주제처럼 너무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순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순종이 종적을 감추었다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으로서의 자리와 영광을 버리고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제물이 되시도록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자기를 비우지 못함’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기 비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제자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의 중심된 의미가 ‘자기 비움, 자기 버림’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영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습니까? 아마도 이 물음에 자신 있게 ‘아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진정한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 영원한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려면 먼저 자기를 비우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17-31절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 관원이 영생 얻기를 원하여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며 신앙생활을 잘 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관원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원하는 젊은 관원에게 ‘영생을 원하거든 네 모든 것을 비우고 나를 따르라.’고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관원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관원은 세상 재물 때문에 영생을 포기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시면서 순종하라고 하신대로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소중한 성도 여러분, 세상에 많은 재물을 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할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이 죽으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재물과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다.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의 나라의 부요함을 사십시오. 돈 버는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나누고 베푸는 사랑의 삶을 위하여 시간도 내시고 재물도 사용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착한 행실이며,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길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배려와 이해와 관용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영원한 보화와 영원한 영광을 마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