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과 순종의 차이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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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5-07 17:46
*** 내 생각과 순종의 차이 / 열왕기하 5:8-14
열왕기하 5:8-14,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들어가는 말
2005년 뉴질랜드에서 제작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6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꿈을 위해 도전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뉴질랜드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미국 유타 주에 위치한 ‘보너빌 솔트플랫’ 혹은 ‘보너빌 스피트웨이’라 불리는 소금평야에서 열리는 바이크 대회에 참가해 40년이 넘은 낡은 바이크로 본인의 꿈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실제 주인공은 뉴질랜드의 '버트 먼로(Burt Munro, 1899~1978)' 라는 사람인데, 1920년식 인디언 스카우트라는 바이크를 개조하여 미국 유타주의 보너빌(Bonneville)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는 '스피드위크' 에 참가했습니다. 1967년에 공식 기록 296km/h를 달성한 내용으로,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 늙은 주인공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합니다. 늦은 나이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말이다 … 가려 할 때 갈 수가 없단다.”
젊은이들에게는 대단한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늙은 주인공의 말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어떤 형태로든지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 성공하게 되고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가야할 때 또는 결단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정작 가려고 할 때는 갈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영적인 신앙의 삶에 있어서 기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이 달려있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16-17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영적인 기회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순종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순종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순종의 삶을 이루려면 필연적으로 거처야 하는 과정이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길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던 예수님이 앞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내 생각을 따르는 삶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차이를 보면서 바른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봅시다.
본문말씀은 아람 나라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을 패망의 위기에서 건진 용맹한 장군이었고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마침 얼마 전에 포로로 잡혀 와서 장군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유대인 소녀가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나라의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소녀의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은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왕은 즉시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편지와 보물을 주면서 나아만을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며, 아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핑계를 만들려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기가 막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무슨 수로 당시의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겠습니까?!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왕에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는 사환을 통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엘리사가 너무나 괘씸했고, 보잘 것 없는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라는 말이 모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는 분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을 붙잡고 ‘주인님, 어려운 일을 명했더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쉬운 일을 포기하시렵니까?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요단강으로 향했고 자신의 나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나아만의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생각해 봅시다.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던 여행자가 준비해온 물이 바닥났습니다. 오아시스를 기대했지만 찾을 수가 없고 달리 물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목은 점점 말라 와서 이제는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최후로 자신이 타고 있는 낙타를 죽여서 수액과 피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낙타를 죽이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만 타는 목마름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여행자가 자신의 생명의 최후 보루가 될 낙타를 죽여서라도 해소 하고 싶은 갈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간절함’입니다. 구약에서의 전쟁사를 보면 종종 오랫동안 포위되어 음식이 고갈된 성읍에서 자신의 어린 자식을 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갈증이나 베고픔이 이렇게 강렬한 것은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간절함’입니다. 아마도 나아만이 포로 소녀의 말조차 믿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병이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잠언 8:17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고, 예레미야 29:12-13절에서는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간절한 소망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봅시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여러분의 성경에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에 중요한 표시를 해 두십시오. 영의 생명을 위협하고 영적인 소망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곧 ‘자기 생각, 자신의 뜻’을 의미하는 ‘자아’라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를 제공했던 17세기의 문예부흥이 있습니다. 이 문예부흥은 세상의 역사에는 괄목할 만한 대 변화를 몰고 온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책들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고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인본주의와 합리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인간 자아의 극대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자기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유토피아(utopia, 이상향, 이상적인 나라, 낙원)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이처럼 합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고 인본주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중심의 세계를 이룬 원동력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말씀하는 내용이 말세 때 인간중심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아이며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앞서게 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제각기 나름대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상상을 더하여 온갖 생각들을 쏟아냅니다. 아마 나아만 장군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아람의 2인자인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선지자가 직접 나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거나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앞에 있는 나와 동일한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 14:4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사람의 생각이 판을 치는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3-14절을 봅시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집의 종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꾸어 생각하면 나아만 장군은 평소에도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옳은 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종들이 감히 자신의 주인에게 충고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복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많은 하나님의 복이 약속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말씀 중에 두 곳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7:15절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리고 야고보서 4: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많은 복이 약속 되어 있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로잡혀 온 여자아이의 말을 들은 것이나 종들의 충고를 들은 것이나 모두 나아만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4: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5:6절에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비록 나보다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이 나를 충고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누군데 네가 감히!’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옳다고 여겨진다면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8:16절에서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어둠이 깊어가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지더라도 내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시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인정받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어 영광스러운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