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조각하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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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08 14:35
*** 삶을 조각하십시오. / 창세기 13:5-13
창세기 13:8-13,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허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19년 첫 주일입니다. 변함없이 은혜로 새로운 해를 열어주시고 경배하고 예배하도록 모든 환경과 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첫 주일에 예배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삶의 비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을 분별하고 찾기 위하여 한 가지 팁(tip)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팁은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조성하시는 환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됩니다. 간단하게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출발하면서 아시아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환경을 통하여 바울의 길을 방해하셨습니다. 즉 바울이 가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절에서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하셨고, 그래도 계속 아시아 방향으로 향하는 바울에게 7절에서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계획하신 뜻을 위하여 때로는 환경을 통하여 삶의 길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조성하시는 환경을 깨닫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너스 조각상을 본 후에 감탄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보잘 것 없는 돌에서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형상은 처음부터 그 화강암 속에 있었지요.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만 깎아냈을 뿐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평범한 돌 속에서 비너스를 본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안목이며 이 안목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조각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흔해빠진 돌에서 비너스를 본 것처럼 영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 속에서 비너스 형상을 찾아냈다고 할지라도 잘 다듬는 기술이 없으면 그 안목은 소용이 없듯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의 삶을 다듬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2:47절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그리고 요한일서 2:17절에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여 우리를 위하여 큰 은혜를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안목으로 삶을 조각하시기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란 땅을 떠난 아브람과 롯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하란 땅에 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즉시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가나안 지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하나님께서 아직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지 않으신 때였습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이 함께 했었는데 이들은 가나안 지역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은 그리 넓은 곳이 아니어서 아브람과 롯, 두 가족이 목축을 하기에는 좁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의 종들 사이에 자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을 좋지 않게 여긴 아브람이 조카 롯을 불러서 ‘우리가 다투지 않도록 서로 다른 지역으로 옮기자.’고 제안합니다. 아브람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롯이 어떤 지역을 택하든지 아브람은 그 반대 지역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롯은 동서남북을 죽 훑어보고는 물이 넉넉하고 초장이 발달한 평야지역을 택했습니다. 그 평야지역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도시지역이었습니다. 자동적으로 아브람에게 주어진 지역은 그 반대지역인 가나안의 산지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러한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느 지역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목축에 부적합한 산지를, 롯은 목축에 최적지인 평야지역을 택하였지만 결과는 산지를 택한 아브람이 거부가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찾으셨나요?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각각 조각한 자신의 삶에 있습니다. 아브람과 롯, 두 사람이 각자 선택하고 만들어간 삶의 여정이 바로 자신들이 조각한 삶이었습니다. 이들이 조각한 삶이 형편을 가늠할 수 있는 장면이 본문 11-13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람과 롯 두 사람의 결말이 왜 달랐는지를 감 잡으셨습니까?
※ 삶을 조각하려면 먼저 좋은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로 가봅시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뛰어난 미적 감각 즉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비너스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그 비너스를 조각할 돌이었습니다. 건물을 설계하는 설계사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건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만 그 건물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도면을 만드는 것이지요. 이들에게 좋은 안목이 없다면 결코 훌륭한 조각품이나 건물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미래의 좋은 집을 위한 훌륭한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좋은 안목으로 삶을 설계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으로 가 봅시다. 조카 롯이 삶의 설계를 위하여 위치를 살핍니다. 그런데 요단강 지역의 평원을 보니 환상적입니다. 물도 풍부하고 초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망설일 것도 없이 요단 지역의 평원을 택하였습니다. 롯의 안목은 여러분이 보셔서 알 수 있듯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입니다. 즉 육신적인 삶의 풍성함만을 생각했습니다. 이들처럼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회가 롯과 같은 안목으로 삶을 설계합니다. 이를 두고 기복주의신앙 혹은 번영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생명의 길이 아니라 부귀영화를 따르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의 선택을 봅시다. 일단 아브람은 믿음과 화평의 길을 선택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육신적인 풍요가 아니라 조카 롯과의 화평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브람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앞에서 보았던 창세기 12:1-2절의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람은 자신이 어떤 지역에 머물든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룬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본문 12절 상반절에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라고 했는데 이 가나안은 곧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의 비전 곧 영적인 안목은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좋지 않은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안목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할 때 이 영적인 안목이 열리게 됩니다.
※ 좋은 안목으로 설계 했으면 삶을 조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3:10절에 이어지는 1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하십니다. 앞의 10절 말씀은 영적인 집의 설계도이며, 12절의 말씀은 집을 조각하는 실제의 삶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브람처럼 흔들림 없는 자리가 정해졌으면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고 충성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충실해야 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십니다.
롯의 삶의 조각을 보면 본문 12절에서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이렇게 육시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안목은 결국 세속적인 것에 빠져들게 됩니다. 롯은 풍요로움과 편리한 삶에 이끌려서 동성애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간 것을 아브람이 구출하기도 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때, 결국 롯은 모든 소유를 다 잃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적 가치관으로 경영한 세속적인 삶은 아무런 미래적 보장이 없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조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경영이었습니다. 본문 이후의 14-18절을 봅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인 안목을 가진 롯을 의도적으로 분리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자손 대대로 거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을 조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한 가지 당부할 말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안목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조각하되, 자신의 시간표나 바람대로 하지 말고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시간표는 내 시간표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빠르게 이루어주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실망과 좌절의 지경에 이르도록 더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마음이 조급하여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으로 경영하면 사울 왕처럼 버림당하게 됩니다. 이런 삶의 군더더기를 떼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요한복음 16:23-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019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적인 안목으로 삶을 조각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여러분의 삶에는 기적이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