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그리스도인 된 도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598회 작성일 2017-11-22 20:25


*** 그리스도인 된 도리 / 고린도전서 15:3-11

고린도전서 15:3-11,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캠프를 운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많이 뚱뚱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무척 어색하고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였습니다. 대형버스 한 대가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캠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캠프 운영자는 사무실 창문을 통하여 버스가 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운전한 운전기사가 내렸는데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20세의 뇌성마비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똑바로 걷기는커녕 손발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얼굴은 일그러지고 온 몸이 꼬여서 보기조차 흉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 운전자는 사무실로 와서 운영자에게 ‘캠프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그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는 긴장했는지 두 손을 꼭 모으고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떠듬거리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음식을 똑바로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똑바로 걷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또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독특한 존재로 만드셨듯이 저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 뚱뚱한 캠프 운영자는 자신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결코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고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다분히 주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감각이나 느낌, 생각이 다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주관적 감정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까지 더해져서 사회가 갈수록 삭막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까지도 변하게 했습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진정한 마음으로 감격하고 감사하는’그리스도인을 만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불평할 일이 없는, 아니 불평해서는 안 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나라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불과 60-7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상위 20위 안에 드는 부자나라가 되었으며, 세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감사를 잃어가고 은혜를 잊어갈까요?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신명기 6:12-13절입니다.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리를 행하고 있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부활장의 서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임을 말합니다. 특히 자신이 이렇게 엄청난 은총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을 증언하면서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은 이후에 전하는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3절부터 7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전해들은 사실이며, 8절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말하며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경험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 그리스도인 된 도리는 받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6-47절을 봅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의 범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숙한 삶의 도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각박하여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처럼 받은 은혜조차 헌신짝처럼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생명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결단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찬송가 216장 4절입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앞서 찬송을 부를 때 어떤 마음으로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만 가지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대가(代價)’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가로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조차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304장 찬송에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라고 고백합니다.

그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언제 받았습니까?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느니라.” 우리가 구원 받은 때는 ‘우리가 죄인일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을 때 구원하셔서 살려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놀라운 이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하십니다. 어찌 이 은혜를 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장래까지 보장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여러분의 힘과 능력과 지혜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참새 한 마리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의 생사화복이 어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겠습니까? 시편 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고, 잠언 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66:9절에서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리는 이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도리는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에 알폰소 12세라는 그리스도인 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에서 자라는 소년들이 ‘식사기도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은 연회를 열고 소년들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식탁은 산해진미로 가득했고, 소년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식사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회 도중에 더럽고 냄새나고 누추한 옷을 입은 거지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 거지도 왕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놀랐지만 왕이 거지를 쫓아낼 것이라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식사를 끝낸 거지는 아무 말 없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소년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야비하고 천한 거지같으니!” 그러나 왕은 그들을 조용히 하라고 명하고는 소년들에게 말했습니다.
“소년들아, 너희들은 저 거지보다 더 뻔뻔스럽고 대담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매일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거나 은총을 바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언 27:5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면책”이라는 말은 ‘옷을 몽땅 벗겨진 부끄러움’이라는 “면(open)”이라는 말과 ‘질책’ ‘책망’등의 뜻을 가진 “책”이라는 단어의 합성인데, ‘부끄러운 질책’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보다는 그 사람이 부끄럽도록 책망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마음속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감사를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을 죽이기까지 한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까지 세우신 은혜를 자신의 생명을 다하는 전도의 삶으로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본문 9-10절을 봅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시편 116:12-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시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이름을 부르며 감사제를 드리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가족들이 서로 말하며,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하나님을 높입니까?

골로새서 3:15-17절을 봅시다.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감사하며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17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을 표현하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합니다. 이 모든 표현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를 매일 생활 속에서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찬송으로 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전한다든지, 섬김과 헌신과 봉사로든지 어떤 형태로라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어서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합시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것이 아니라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는” 삶으로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 된 도리를 다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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