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 아름다운 사람 / 고린도후서 1:3-7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들어가는 말
오늘 제목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는데, 혹시 외모가 아름답거나 잘 생긴 것을 생각하셨다면 잘 못 생각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름다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잠언 31:30절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3-4절입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 살펴볼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월스트리트 저널’이라고 하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국민 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고무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링컨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회고하기를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평가되기를 원합니까? 본문말씀에서는 고난 중에서도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지금 여기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아름다운 사람의 모범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는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사신 아름다운 사람으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런데 세상 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인생의 실패자에 더 가깝습니다. 돈이 많았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학식이 많았습니까? 하다못해 추종자라도 많았습니까? 사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은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인 33세에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실패자입니다. 이사야 53:2-3절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지만 예수님의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보면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도록 정말 아름다운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인정하고 칭찬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고기잡이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나 모두 믿음도 소망도 없는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책망과 훈계보다는 삶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절에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새벽에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위하여 불을 피우시고 음식까지 준비하셔서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사는 본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이 행복하
게 사는 것 즉 아름다운 사람의 삶입니다. 신명기 10:12-1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의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성공과 실패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으로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 아름다운 사람은 위로자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위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arakaleo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가까이서 부르다.’, ‘위로하다.’, ‘용기를 북돋아주다.’, ‘슬픔을 없애주는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특히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게 되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초상집에서 밤을 새워주는 그런 미덕이 있었습니다. 전도서 7: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즐거울 때에 함께하는 것은 쉽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함께 하는 것은 그리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들 때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오래 기억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잠언 17:17절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하십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인생의 위기 때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안고 도산했습니다. 온 가족이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자신은 견딘다고 해도 가족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서 밤늦도록 거리로 강변으로 배회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온통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잠깐 함께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를 안고는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 나의 진실을 믿어 준다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장로님은 다시 용기를 얻었고 몇 년이 지난 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지금도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친하고 가깝다는 이유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함부로 대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 또는 친한 이웃들에게 악한 생각 없이 던진 말 한 마디가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 위로해야 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생활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 영향은 곧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위로자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받는 위로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입니다. 이사야 40:1절에서도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자신의 죄악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도 ‘핍박과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전하여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위로와 격려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게 합니다.
※ 아름다운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줍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환난이나 고난을 이렇게 기쁘게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약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실수투성이인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고 스스로 깨닫고 돌이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까지도 그가 가슴을 치며 회개했을 때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정에 끌리거나 택함 받은 민족이라고 좋게 여겨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라고 무조건 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아셨고 또 그대로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 중 하나는 남을 깎아 내리는 버릇입니다. 자기보다 낫다 싶으면 그 꼴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아래에서 흔든다.’고 했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미국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심장에 치명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즉 남의 약점과 실수를 꼬집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소련의 장수학자인 ‘구리아닌’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단명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인정하는 말이나 칭찬은 사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하며 분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2:3절에서는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잘못할 때마다 비난하거나 강요했다면 이 말씀에서처럼 담대하게 고난을 헤쳐가거나 다른 사람을 위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나와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용기를 주고 사람을 세우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실천을 미루지 말고 이 시간 이후부터 가장 가까운 가정부터 시작해서 위로와 격려와 인정하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출발하십시오. 체중을 줄이기 위하여 다이어트 책을 수십 번 읽는다고 살이 빠지지 않습니다.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하여 에어로빅 영상을 수없이 본다고 아름다운 몸매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방법을 알려준다고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구마 재배는 순을 심은 후에 줄기가 번지기 시작하면 열흘에 한 번 쯤은 순을 뒤집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마 순은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면 영양분이 분산되어 제대로 된 뿌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본을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서나 하나님께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