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것과 맡기는 것
*** 믿는 것과 맡기는 것 / 시편 125:1-5
시편 125:1-5, “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나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서 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사하시고 죽음에서 건져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갈라디아서 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그렇습니다. ‘생명과 자유’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진 값진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값진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삶을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힘겨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생명과 자유를 믿는다면 신앙의 삶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무거운 짐처럼 여기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자신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삶 중에서 잘 알면서도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맡김’일 것입니다. 이 믿음과 맡김을 성경에서는 ‘신뢰’ 혹은 ‘의뢰’라고 표현합니다.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따라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생활의 어려움이나, 고통, 자녀문제, 물질문제 등. 많은 짐들을 맡기려고 힘써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짐을 맡기러 갔다가 다시 되가져오곤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문제와 짐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했지만 돌아서면 다시 그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일과 무거운 짐을 주님께서 맡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만 맡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은 주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를 ‘쉬르함마아롯’이라고 하는데, ‘상경송’(A Song of Degrees AV),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ASV)’ ‘순례자의 노래(ASV)’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언급하는데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이 노래들이 큰 절기들을 위해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위한 찬송가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본 시는 시편 분류상 ‘시온 시’로 분류되는데, 작자도 모르고 시의 배경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 사이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에 돌아 왔을 때 지은 노래라고 추정합니다.
본문은 시편 1편과 마찬가지로 공의의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셔서 의인에게는 끝없는 보호와 영광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최종적 심판을 내리시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견고함과 안전을 ‘시온 산’에 비유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흔들리거나 요동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 신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죠지 뮬러’목사님은 일생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고아들을 위해서는 많은 돈도 필요했습니다. 그의 생애에 지금의 가치로 약 2,500만 달러의 헌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뮬러 목사님은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고아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요청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살았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염려나 갈등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고아원에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나서 점심 끼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아원의 총무는 뮬러 목사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전과 같이 식사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앉히고 배식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식사 시간이 다가 옵니다. 지금쯤은 배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음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총무는 다시 목사님에게 ‘기도만 한다고 되겠느냐? 음식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투로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고아원 정문으로 트럭이 들어왔습니다. 그 트럭은 빵을 가득히 싣고 있었으며 ‘배달처의 사정으로 빵을 배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아원이 있어서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빵을 드려도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빵은 점심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식탁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 총무는 해임되었습니다.
뮬러 목사님의 행동이 조금은 무모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즉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이루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믿고 행동하는 것을 ‘신뢰’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베푸십니다. 역대하 16:9 상반 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에 대한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 혹시 악인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 대한 영원하고 특별하신 보호, 그리고 의인과 악인의 대조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믿음에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즉 믿는 것과 맡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은행은 우리의 돈을 안전하게 관리해 주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은행을 안전한 곳이라고 믿고 있지만, 내가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고 있다면 이것은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은행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신뢰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내가 여행을 위해서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기차역으로 간 것은 기차가 나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차역까지 왔다고 해서 믿음을 행사한 것은 아닙니다. 표를 사서 기차에 올라탔을 때 비로소 기차를 신뢰한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4:2절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떠나면 세상의 다른 글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뢰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이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모든 전투 때마다 함께 한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대왕님의 주치의가 어느 날 아침, 대왕을 독살하기 위하여 대왕님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컵에 있는 물을 마셨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주치의를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신앙고백을 하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시인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를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온 산이 변함없이 굳게 서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는 외부의 환경을 초월하여 마음이 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아 생명을 소유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연약한 人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연약한 인성은 험한 세상을 사노라면 때로는 흔들리고 세상의 허무한 물질과 쾌락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성도가 영원히 타락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문에서는 “의인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도록, 의인들이 차지한 땅 위에서 악인이 그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가 자꾸만 세상의 길로 가면 때려서라도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택하심을 후회하시고 버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로마서 11:2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가 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움을 입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4-5절입니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의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반면에 악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에서 “선한 자”나 “정직한 자”라고 표현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지 않고 신실하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실 것을 간구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을 받아 불의 징계로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죄가 극심하여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죄가 극심하다 할지라도 살 수 있는 길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하면서 여섯 번이나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합니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렵니까?”라고 탄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45명, 40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려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시인이 ‘선인’이나 ‘의인’, ‘정직한 자’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우리 시대가 평안을 누리는 것도 이 시대가 선하거나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인의 편에 서서 유익하게 역사 하십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의인을 향하여 일하십니다. 세상의 대적자들은 성도를 괴롭히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로마서 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신뢰는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심을 믿고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긴 후에는 근심의 빛이 전혀 없는 것이 진정한 신뢰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승리하는 생활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