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 하나님 앞에서 / 빌립보서 4:4-9
빌립보서 4:4-9,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들어가는 말
어느 부잣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한다.’는 수소문을 들은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부잣집 주인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이 있게 대답했습니다. "잠자는 걸 가장 잘합니다." 주인은 그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땅한 사람도 없고, 그래도 사람은 성실해 보여서 그를 일꾼으로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지런히 일을 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유달리 천둥과 번개가 심한 밤중이었습니다. 심란해진 주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 구석구석 비가 새는 데는 없나 하고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집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을 살피다가 코를 골며 자는 일꾼을 보게 되었습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부었지만 일꾼은 낮 동안 힘을 다해 모든 일을 해놓았기 때문에 손 볼 곳도 없었고, 천둥 번개가 요란했지만 피곤해서 깊이 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주인은 잠자는 걸 제일 잘한다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울수록 빛은 밝게 빛나고, 시대가 혼란스럽고 악해질수록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빛이 납니다. 태양은 자신이 밝다고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아도 모든 생명체는 태양이 떠 있음을 압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잠시 잠깐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곧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겨버립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시사토론 시간을 마치면서 진행자는 “이제는 정말 두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의 부정부패, 마지막까지 청렴을 지켜야 할 법관들의 부패를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북핵문제와 최근의 지진사태, 사회의 혼란을 말하면서 ‘이렇게 가다가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이러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무감각하고 무신경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통하여 이미 이 시대의 상황을 예고했으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세상 끝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지금은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이 시대를 민감하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일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영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본문 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하십니다. 즉 ‘배우고 받고 듣고 보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가 행하여야 할 행동지침에 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생각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건 반응이라든지 육신의 방어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동작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육신의 본능입니다. 미국의 수필가인 ‘렐프 웰드 에머슨’은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그대로 되기 마련이다”고 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피일’은 “생각을 바꾸면서 자기 세계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의 행동의 근원은 마음이며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28절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요한일서 3:15절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품은 생각을 이미 행동으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들만 보아도 두려움으로 오금이 저립니다. 아마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마음의 생각으로는 수없이 죄를 반복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7:20-23절을 봅시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내용에서 단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읽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만 듣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생각을 읽으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립해야 할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립해야 할 마음입니다.
본문 8절을 읽어봅시다. (현대어성경) “형제들이여, 이제 이 편지를 끝맺기 전에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참된 것과 선한 것과 옳은 일에 단단히 매어 두십시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생각하고 남의 아름답고 좋은 점을 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 찬양과 기쁨을 드리는 일만을 생각하십시오.” 좀 더 이해하기가 쉽지요.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참된 것과 선한 것과 옳은 일에 단단히 맬 수 있는 길이 본문 4-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들을 요약하면 ①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②사람에게 관용하는 것 ③감사함으로 하는 전적인 신뢰의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으로써 공통점이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기쁨’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실 때 나타는 성품입니다. 요한복음 15:10-11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주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에 진정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관용’은 사랑의 표현 중의 하나이며 ‘점잖은 너그러움’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38-42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의 요지가 ‘관용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의 사랑이 들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감사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감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자신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정립해야 할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6: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맞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 하나님 앞에서는 정립한 마음을 실행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읽어봅시다. (현대인의 성경) “내게서 배운 것과 내가 행하는 것을 본받아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렇게 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생각이 많고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좋은 생각은 실천되어져야 비로소 가치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인도에서 교육자회의가 열렸을 때입니다. 그때 인도의 교육자인 ‘케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현대인의 행동 결핍을 꼬집는 것입니다.
도랑을 파는 세 명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삽에 기대어서 말하기를, “언젠가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 되고 말거야.” 또 한 사람은 “하루 일당이 이게 뭐야?”라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도랑을 팠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계속,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 될 거야!” 하며 삽에 기대어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당이 적다고 불평하던 사람도 계속 “하루 일당이 아직까지 이게 뭐야!” 하며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땅을 파던 사람은 지게차를 하나 사서 그 지게차로 열심히 물건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언젠가 나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던 사람은 머리가 희어져도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몰라준다고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당이 적다고 불평하던 사람은 권고사직을 당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4:17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소망이 크고 위대할수록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세, 아브라함, 요셉, 다윗, 바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과 소망을 위하여 오랜 시련의 시간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련의 기간을 성실하게 일하고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실행하는 것을 결사코 막으려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왕국이 타격을 받고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훼방합니다.
며칠 전에 내셔널 지오 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동물의 세계에서 정말 신비로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뉴질랜드의 습한 밀림에서 사는 동물들을 취재하는 중에 ‘각다귀 유충’의 행태를 집중 취재했습니다. 각다귀 유충은 ‘냉동 짱구벌레’라고도 하는데 모기랑 똑 같이 생겼는데 서너 배가량 큽니다. 그런데 뉴질랜드 습지의 각다귀 유충은 반딧불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유충입니다. 이 유충은 나뭇가지에 이슬방울 같은 끈끈한 점액 방울을 진주 목걸이처럼 늘어뜨립니다. 그런 줄을 한 마리의 유충이 10-20줄 가량을 만들고 그 줄 위를 오가면서 푸르스름한 밝은 빛을 냅니다. 유충이 배가 고프면 더 밝은 빛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빛이 끈끈이 점액 방울에 반사되어 어두운 밀림에 마치 성탄절 장식처럼 너무나 환상적인 빛을 발합니다. 그것도 수 백 마리의 유충이 빛을 내니 그곳이 음산한 밀림이라고는 상상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치명적인 유혹의 불빛에 이끌려 수많은 곤충들이 죽음의 그물로 몰려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음산한 밀림과 같은 세상을 각다귀 유충처럼 죽음의 그물을 현란한 불빛으로 감추고 사람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현란한 불빛에 이끌려 육신의 욕망과 세상적인 삶에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허비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2-34절을 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세상적인 삶에 이끌려 육신적인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야고보서 말씀처럼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정립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유혹이 많고 어지러운 환경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정립하고 행동하여 승리자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