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사람
*** 준비하는 사람 / 요한계시록 22:10-16
요한계시록 22:10-16,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들어가는 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역사, 믿음의 사람들의 글, 수많은 이적들과 비유와 묵시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글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고 보존되고 전해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많은 기록자들이 모든 문화와 인종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힘써야 합니다. 특히 성경말씀에는 생명과 관련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고(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생명과는 상관없지만 상급과 연관된 것(고린도전서 3:10-15,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연관된 말씀들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전에도 본문말씀으로 여러 번 다른 주제로 증언한 바 있습니다. 2006년 11월 6일 주일에는 ‘보상과 상급’에 대하여, 2007년 2월 19일 주일에는 ‘천국잔치’에 대하여, 2015년 12월 28일 주일에는 ‘기다림’에 대하여 전한 바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준비’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어떤 역사나 고전을 대하듯 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그 말씀과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화를 캐내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무엇에서 떠나라고 하시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하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계시록처럼 ‘묵시서’로 분류된 글들은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묵시(黙示)의 글들은 특수한 성격을 가진 문체로 기록되어있으며, 인간에게는 직접 알려져 있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인간의 역사 및 그 고난의 의미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다니엘,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이 이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들은 사람들이 읽어서는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요한에게 책을 열어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책이 열려 있다함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길을 열어 놓은 이유는 “때가 가깝기”때문입니다. 때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말씀의 의미를 열어놓을 만큼 중요한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 마지막 때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의 상황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32-33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 말씀에서 “이 모든 일”이란, 비유 앞쪽에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종말의 징조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에서는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는 ‘성품의 영구성(the permanence of character)’이라고 합니다. 즉 ‘마지막 때의 고통이 각 개인의 성품을 이미 지금까지 형성해 온 자기의 습관대로 고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주 무서운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성품은 전혀 변화되지 않도록 고정화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를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지옥 같은 세상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에서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사모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여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무렵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실컷 놀고 하고 싶은 것 다하다가 마지막 무렵에 돌아서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에서는 극적인 반전(反轉)이나 이변(異變)들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며칠 전에 끝난 올림픽에서도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이변들이 일어났습니다. 펜싱은 15점을 내면 이기는 경기인데 마지막 3세트에서 10:14로 박상영 선수가 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한 점씩 따라붙던 그는 몇 초를 남기고 15:14로 극적인 우승을 했습니다. 국민들을 열광하게 한 경기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이런 극적인 반전이나, 전혀 예상을 뒤엎는 이변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나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영적인 이변이나 극적인 반전이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마지막 때에는 이변과 반전이 없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므로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더 늦기 전에 지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 기회가 있을 때에 준비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복인 14절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빤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함’을 뜻합니다. 이 마지막 복은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기회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거나 세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안록산의 군대가 옹구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옹구성의 수비대장은 ‘장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록산의 반란군이 워낙 거세어서 옹구성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순은 묘책을 써서 모든 병사들에게 ‘짚으로 인형을 천개이상 만들어서 검정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들을 새끼줄에 엮어서 한밤중에 성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정신없이 활을 쏘았습니다. 한 참 지난 후 장순은 인형을 걷어 올리게 했고, 힘들이지 않고 인형에 꽂힌 수만 개의 화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중에 장순은 5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갔습니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또 속을 줄 아느냐?’는 듯 활을 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장순의 정예군은 단번에 안록산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와를 속이던 때처럼, 주님의 재림과 부활에 의심을 품게 만들고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회가 언제 갑자기 지나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지금은 아니고, 세상을 조금 더 즐기고 돈도 벌어놓은 후에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여유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나, 우리 인생의 종말은 어느 날 소리도 없고 예고도 없이 다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러 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컷 즐기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겠다는 요행심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12절에서 ‘불의한 자는 불의 한 대로,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주님을 맞이하게 되며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극적인 반전도 이변도 없습니다.
특히 15절에서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목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21: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이 진실하고 확실한 것을 보증하시려고 16절에 사인을 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디모데후서 2:20-21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다급하게 준비하려 하지 말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 나라의 예복인 두루마기를 잘 빨아서 깨끗하게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