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사랑의 배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351회 작성일 2016-08-22 13:29
*** 사랑의 배려 / 마가복음 6:30-34

마가복음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이야기의 정점은 인간의 창조이며,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끝이 나지만 안식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룰 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복인 14:13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요한복음 5:17절에서 안식일에 일한다고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역사가 끝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룰 때에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피곤함과 수고로움을 위하여 안식일 즉 주일이라는 쉼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2:27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그리고 시편 78:37-39절에서는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이처럼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며 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려하시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이 사랑의 배려를 삶에서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이야기의 서론부분입니다. 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렇게 서론이 붙은 곳은 마가복음뿐입니다. 이 이적의 이야기가 있기 이전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도록 여러 지역으로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사역을 마친 후에 돌아와서 예수님께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그 때에 수고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한적한 곳을 찾아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벳세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가버나움에 있었던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30KM 정도나 되는 먼 거리를 쫓아왔던 것입니다.
그 무리들의 갈급함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날이 저물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음을 아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무리는 영의 풍성한 양식을 먹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신의 배고픔과 피곤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 일어난 동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박해와 삶의 고통으로 찌들어버린 무리들에게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의 양식으로 쉼을 주신 것입니다.

※ 사랑의 배려는 삶으로 보이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덕목 중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천사의 말을 하든지, 자신의 모든 재산으로 구제하든지,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든지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6:14절에서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사랑이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요한일서 4:7-9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노래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필수 덕목으로써, 행동이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시골 분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출퇴근을 하려면 시냇물을 건너야 했는데 다리가 없어서 큰 돌을 줄지어 놓은 징검다리로 건너야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면서 그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돌 하나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큰 돌을 바쳐놓은 고임돌이 빠져서 발을 딛자 무게를 못 이기고 기울어진 것입니다.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도착하자 마침 서울에서 내려오신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얘야 어쩌다 그렇게 온 몸이 젖어버린 거야?” “네 , 제가 징검다리를 건너오다가 잘못 놓인 돌 때문에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은 바로 놓고 왔겠지?” 아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그 돌을 바로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나무라며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시냇물에 빠질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냥 올 수 있는 거냐. 당장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씀이 야속하게 들렸지만, 백번 생각해도 맞는 말씀이므로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며 ‘무슨 일을 하든지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생님처럼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마음 쓰느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야 하는 배려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주셨음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턴’ 이라는 영화 속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하는 좋은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런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지 아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 남을 배려하는 깊은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손수건의 용도가 이러하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3년 공생애의 삶은 지금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배워야 할 모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망설임 없이 독생자를 내 놓으신 인간을 배려한 행동하는 지극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제자들을 향하신 깊은 배려는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중에 호수를 힘들게 노저어가는 제자들을 위하여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으며, 본문말씀에서는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섬김으로 피곤에 지쳐 있는 제자들에게 쉼을 배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수많은 이적을 행하신 것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경험했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수없이 되뇌는 ‘사랑’이라는 말은 그저 말로만 그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내뱉는 말 중에 “다음에 식사한 번 합시다.” “다음에 연락할게요.” 저는 처음에 이런 말을 듣고는 소식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 어리석었지요. 그 말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인사치레로 하는 말인데 곧이곧대로 들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렇게 인사치레로 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말도 이렇게 생각 없이 내뱉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랑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로만 사랑을 외치는 이유는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인 줄 압니다. 정말 표현하는데 어색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표현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여전히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습니까? 이처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해야 하는 줄은 아는데 아직도 방법을 찾지 못해 어색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이 방법을 따르면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배려’입니다. 배려는 사랑을 그나마 조금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전에 학생부 수련회 때에 ‘땅콩과 땅콩 껍질’이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련회를 시작할 때에 참석한 인원 모두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통에 넣고, 차례로 한 사람씩 통에서 쪽지 한 장씩을 가집니다. 뽑은 쪽지에 적힌 사람이 자신의 땅콩이 되고 자신은 그 사람의 땅콩껍질이 됩니다. 땅콩껍질이 땅콩을 보호하고, 좋은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처럼 자신이 뽑은 땅콩 짝을 그렇게 보호하고 최고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단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땅콩이 자기의 땅콩껍질을 알지 못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서로를 배려함으로써 서로를 깊이 알게 되고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하고부터는 서로를 대하는 마음부터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작은 배려를 시작으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진실한 사랑이 싹이 트게 됩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나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배려가 얼마나 깊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따로ㅊ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제자들의 배고픔과 피곤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이 마저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에 굶주린 수많은 무리들이 그 먼 길을 달려 주님을 따라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의 양식부터 공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양식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또 다른 이적인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에서의 말씀을 봅시다. 마가복음 8:2-3절입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배려는 오늘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생명에서 낙오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도록 심판을 미루시고 또 미루십니다.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도 또한 이렇게 주님을 닮은 사랑의 배려를 삶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미국 미주리(Missour)주,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입니다. 그날따라 많은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마다 하나같이 삭발을 요구했습니다. 손님들은 50여 명 정도가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이상한 광신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친 소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자, 목사와 몇몇 교인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런데 소녀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서 외출을 못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로 돌아온 목사와 교인들은 모두 머리를 깎기로 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소녀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했습니다.
주일, 엄마는 소녀를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모든 교인이 빡빡머리인 것을 본 소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상황을 중계하던 리포터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 역시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모든 면에서 극도의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불법과 비리들이 판을 치며, 경제적인 불안감으로 마음이 움츠러들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끔찍한 범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닫히고 서로를 불신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주님으로부터 에베소 교회가 받았던 경고를 우리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변을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돌아보면서 작은 사랑의 배려를 합시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내가 사는 주변을 밝혀가는 빛의 사람으로서의 역할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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