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433회 작성일 2016-08-16 22:59

***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 / 누가복음 14:7-14

누가복음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운 삶의 자세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 중에 나오는 여덟 가지 행복이라든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곱 가지 복의 길 등이 이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 살펴보려는 것은 ‘낮은 자리’ 혹은 ‘낮은 마음’ 즉 ‘겸손한 삶’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많은 상급이 약속되어 있는 성품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비호감적 성향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5-27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22:5-7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이것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상적인 성향입니다.

특히 우리 국민성은 ‘일등주의’입니다. 운동이든, 공부든, 사업이든, 세일즈이든지, 하다못해 옷, 장신구, 몸매까지도 튀어야 하고,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성향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기죽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고 있지만 ‘금메달’이 아니면 기가 죽어야 하고, 내 아이가 일등이 아니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공을 향하여, 남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하여 달리고 또 달립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에도 어김없이 들어와서 ‘우리교회가 다른 교회보다는 나아야 하고 무엇인가가 달라야 한다.’는 엉뚱한 경쟁심과 우월감을 가지려고 기를 씁니다. 로마서 12: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낮아지기를 불편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14장은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음식초대를 받았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의 식탁은 디귿자 형태의 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리가 높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석입니다. 사람들은 그 높은 자리 가까이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자리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낮은 마음의 삶’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가르침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한 주인에게도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높은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즉 그 마을에서 유지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또 다른 속셈은 여기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초대해 준 사람을 자신의 잔치에 초대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초대하여 갚음이 되면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있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은 여러분도 잘 하기가 힘들지요? 여러분의 가정에 경사가 있어서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높여줄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1절에서도 경고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시면 낮은 자리를 택해야 합니다.

하버드대 신학대학 교수였던 ‘헨리 누엔(Henri J. M. Nouwen, 1932-1996)'박사는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 arche Daybreak)’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며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장애자 공동체의 봉사자로 들어갔습니다. 이 ‘라르쉬’공동체는 헨리 누엔 교수가 봉사자로 있으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왜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고,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줄곧 올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성공만을 향하여, 다시 말하자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지체인 ‘아담’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설의 봉사자로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내리막길에서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현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 “현실적이 되는 것, 멋있게 보이는 것, 힘이 최고라는 생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남모르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거나, 남보다 뒷자리에 앉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아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를 즐기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45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아마 여러분들도 경험하고 느끼셨겠지만 많은 교회들에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그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교회처럼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세상의 높은 사람은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 곧 섬김의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어떤 젊은이가 늙은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질문해도 좋겠습니까?”
늙은 율법학자가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좋아, 뭐든 물어보게나.”
“선생님, 옛날의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 만났으며 신은 땅위를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으며, 사람들은 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왜 신은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제 땅위를 걷지 않는가요? 왜 신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걸까요?”
늙은 율법학자는, “이보게 젊은이! 신은 아직도 살아계신다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 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어서 그렇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들의 기대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이 탄생 자리였으며, 소외된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려면 당연히 낮은 자리, 겸손한 마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섬김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은 정지된 신앙의 그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생활 속에 녹여내는 삶입니다.

※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한다면 되갚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니 대부분이 마을의 유지들이었습니다. 그 바리새인 지도자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높은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즉 그 마을에서 유지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초대한 이들이 그들의 잔치 때에도 자신을 초대해 줄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세상에서 모든 보상을 다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있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 중요한 잔치가 있어서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높여줄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겠지요. 이름도 없고 초라한 사람을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앞서 읽었던 마태복음 6: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제가 전임전도사 때입니다. 주일 후에는 주일에 결석한 성도와 새로 등록한 성도들을 분류하여 심방을 했습니다. 그 날은 새로 등록한 가정을 심방하기 위하여 등록자를 점검하고 연락이 되는 가정부터 심방을 했습니다. 그 날도 지금처럼 무척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부부가 등록한 가정을 찾아갔는데 그 집은 자동차도 갈 수 없는 부산의 문현동 산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참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늦은 오후에 교회당으로 돌아 왔는데 담임 목사님이 ‘어디를 갔는데 이렇게 연락도 안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이 힘들었습니다. 등록자 심방을 다녀왔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급하게 심방가야 할 곳이 있는데 그런 집에는 무엇 때문에 갔느냐?” 목사님이 말씀하신 급하게 심방가야 할 곳은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사장님의 사무실이었습니다. 그분은 신실한 집사님이었는데 지난 주일에 성가대 지휘까지 잘 하신 분입니다. 당장 심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분을 특별하게 챙기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오늘의 많은 교회가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결론인 9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18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갚으시도록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의 요점은 ‘사람에게 되갚음을 바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한 일들을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수고와 헌신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셨겠지만 더욱 힘써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낮은 자리, 겸손한 섬김의 자리가 여러분이 머물고 일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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