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감동의 사람
*** 신뢰와 감동의 사람 / 사무엘하 15:24-29
사무엘하 15:24-29,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도대체 색깔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온통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과 삶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고 특히 중성을 띠는 사고방식들이 많아서 두루뭉술한 모습들입니다. 음식도 퓨전음식이라고 해서 이것저것 섞어놓은 것이 유행합니다. 옷도 장식품도 남성 여성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 많습니다. 세상이 이러하다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도 영적인 경계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즉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적당하게 혼합하여 편리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잡 된 삶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조차도 감동시켜 드릴 수가 없고 신뢰도 얻지 못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에서 엘리야를 통하여 열왕기상 18: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신앙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신뢰를 받고 감동하시게 하려면 마음이 진리를 따르는 곧은 삶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감동되는 영상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중국의 어느 식당 겸 판매점 같은 곳입니다. 안에는 가장 자리로 돌아가면서 많은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4인용 식탁이 서너 개가 있습니다. 어느 점잖은 신사가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식탁에는 안쪽에 두 명의 남성이, 가운데는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만두를 한 접시씩 시켜서 먹고 있습니다. 들어온 신사는 커플이 앉아 있는 식탁 맞은편에 합석을 했습니다. 신사는 상의를 벗어서 자신의 의자에 걸쳐두고 메뉴판을 들고 음식을 고릅니다. 그 사이에 앞의 커플이 무언가 속삭이다가 일어나서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는 나갑니다. 그런데 커플이 먹던 접시에는 만두가 거의 삼분의 이 이상이 남아 있습니다. 메뉴를 보던 신사는 메뉴판을 접고는 작은 접시에 간장을 따르더니 자연스럽게 커플이 먹고 남긴 만두를 먹기 시작합니다. 안쪽에 있던 손님도, 매장 판매대에 있던 두 남성도 그 신사의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 말을 주고받으며 주시합니다. 하지만 신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만두를 다 먹고는 벗어서 의자에 걸어 두었던 상의를 입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계산대 위의 기부금 함으로 보이는 곳에 음식 값 정도의 돈을 넣고는 매장을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장의 두 남성이 한 사람은 신사가 나간 곳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붙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최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안쪽의 두 손님도 멋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저 역시 그 동영상을 보면서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보아주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의 힘으로 성실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일로 인하여 불이익이나 위험이 와도 신실하게 일하는 사람, 이들이 하나님께도 신뢰를 받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시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이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신실함이 돋보이는 인물이 나옵니다. ‘사독’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독은 ‘아비아달’과 더불어 다윗 왕 시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으로써 ‘아히둡’의 아들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통 제사장 가문의 자손이었습니다. ‘사독’이라는 이름은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독의 의롭고 신실한 성품은 다윗의 위기와 시련 가운데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의롭고 신실한 사람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다윗의 총애를 받던 아들 압살롬이 4년간의 모의 끝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한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급했던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몇몇 신하들과 허급 지급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압살롬은 순식간에 예루살렘 성을 점령했습니다. 다윗은 왕위를 아들에게 빼앗기고 생명조차 위태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다윗의 은택을 입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다윗의 절친한 친구이자 모사였던 ‘아히도벨’의 배반은 다윗을 더욱 위태롭게 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독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다윗을 수행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가져다 두라고 했습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즉 하나님의 처분대로 따르겠다는 순종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이런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감동을 안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께 또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으며 감동을 안겨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겨오던 사람이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커밍아웃’이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커밍아웃’해야 합니다. 즉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로 어디에서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신 있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은밀하게 해야 할 선행이나 구제나 기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어떤 유익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온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자 자신의 의도를 들켜버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사독을 다윗은 선견자로 불렀습니다. 사독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른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25-26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렇지 않고 버리신다고 하더라도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정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로마서 10: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헛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7:21절에서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하여 누가복음 15:25-33절에서 두 가지 비유를 동시에 사용하여 설명하셨습니다. 28-30절은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이며, 31-32절은 ‘전쟁하러 가는 왕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두 비유를 ‘쌍둥이 비유’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비슷한 내용을 거듭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 비유의 결론은 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윗 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처분대로 따르겠다는 절대복종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감동하시게 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사독 역시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왕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자세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신뢰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 자신의 신앙적인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독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른 것은 그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독에게 ‘언약궤를 메고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독의 믿음과 신의도 대단하지만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의 사랑과 믿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서 이러한 믿음의 발상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형편에서,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 신실한 제사장인데 말입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은 다윗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자기 믿음의 확신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는 음식들입니다. 다니엘은 생명의 위협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던져졌으며, 그의 세 친구들은 우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왕의 명령을 알면서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며 자신의 민족의 생명을 위해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독이나, 다윗 왕처럼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불사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독은 비록 다윗의 권유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인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시켜서 상황을 전달하며 다윗의 안전을 도왔습니다. 이처럼 사독은 따라야 할 바른 길과 물리쳐야 할 길을 철저히 구분하고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믿음의 심지가 곧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도 믿습니까? 그렇다면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확신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앙적인 확신을 지킨 사람에게는 또 다른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사독으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점점 어두워지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실한 믿음으로 사람에게 신뢰받고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확신에 찬 영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인도하시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