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 에베소서 2:11-22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세상에서 유일하게 거대한 이념의 장벽으로 나뉘어 있는 땅, 대한민국, 사랑하는 우리의 조국. 지금 이 조국의 반쪽인 남쪽은 또 다른 이념의 갈등으로 둘로 나뉘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이념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생각과 뜻이 달라서 일어난 갈등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회는 교리가 달라서 또는 서로의 뜻이 달라서 수많은 교파와 교단들로 나뉘어져서 거대한 장벽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단절은 아담 이후의 인간 사회에서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34-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는 복음이 전해지므로 말미암아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갈등과 불화와 단절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단절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단절되었고, 이러한 죄의 출현은 사람들의 사회에 갈등과 단절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 세상의 갈등과 단절을 없애고 화목을 이루게 하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허물지 못하는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셔서 독생자이신 성자 예수님을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죄로 인한 갈등과 단절의 장벽을 없애고 화목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13-16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평화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2016년 대강절 두 번째 주간을 지내는 우리 자신에게는 갈등과 단절이 없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어떠한 갈등과 단절도 모두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장벽으로 단절된 곳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힐티’는 ‘특별한 인간 행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려 해도 이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힐티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 안에서 참다운 행복론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행복론자가 되었습니다. 77년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그 때부터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바로 주님 안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임을 경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자신의 행복론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책상머리에는 빛바랜 낡은 성경과 ‘영원한 평화’라는 논문을 쓰다 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힐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지만 세상의 것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진정한 평화도 행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불법과 거짓을 만들고, 불법과 거짓은 갈등을 일으키며, 이러한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단절이 됩니다. 사람들은 갈등과 단절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의 자루만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의 영은 모든 것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평화가 깨어지고, 행복이 사라지고, 갈등이 생겨난 것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로마서 5: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죄가 해결되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갈등과 단절은 차별을 일으키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합니다. 본문 11-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에베소교인들의 상태가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 그대로였다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소외는 매우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전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 있었고,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유대인 남성을 위한)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유대인 여성을 위한)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 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마26:69). 높이가 1.5미터 가량인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결코 성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본문 12절의 “그 때에”라는 접속사가 바로 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우상과 미련한 세상 풍습과 육체를 따라서 살아갔던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대단한 식견과 야망과 자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입니다.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어떠한 삶도 참된 소망이나 만족이나 행복이 없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길이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육체적인 삶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일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단절된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죄 아래서 소망도 없이 갈등과 단절과 고달픈 삶을 사는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마구간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없는’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모두 쏟으시고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죄의 장벽에 갇힌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본문 13-18절을 봅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3절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는 상황의 반전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암시합니다. 이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루실 것’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4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 즉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2:5-6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라.” 이 말씀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소외당하고 멸시받았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불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서로서로도 멀리 있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멀리 있었던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가리던 휘장이 찢어져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이라는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선민과 이방인의 한계를 무너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도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사람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23-2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람 사이에 갈등과 단절이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본문 19절의 “그러므로” 이하의 말씀은 오늘 말씀의 결론부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든지 원망들을 만한 일이 없습니까? 사람 사이에 갈등과 단절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없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밝혀가야 합니다. 이참에 부모님이나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 주변 사람들과 쌓인 갈등이 있다면 화목을 이루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12: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갈등과 단절로 몸살을 앓는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가까운 내 가족부터 주변의 사람들과 진정한 화목을 이룹시다. 그리하여 2016년 성탄절이 다시 오실 주님을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준비된 평화의 계절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