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용서의 삶
*** 이해와 용서의 삶 / 요한복음 8:2-11
요한복음 8:2-11,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 직전에 있게 될 사회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마태복음 24:10-12절입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아주 뒤숭숭합니다.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정작 두려운 것은 사회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언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 중에서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이 사랑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왜냐고요? 지금 사회현상을 보면서 자꾸만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심기일전하여 우리의 구원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감동적이고 내 자신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설교시간에 하기에는 조금 긴 이야기이지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해 봅니다.
어느 가난한 목사님이 학교에 가까운 지하실에 월세를 내는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 예배당 입구 계단에 아침, 저녁으로 침이 하얗게 깔려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하다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여자 중, 고등학교의 학생인 어린 담배꾼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교회 계단 밑 후미진 곳에서 등교 전후, 점심 때, 하교 때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떼거리로 몰려와서 담배를 피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야단 칠 생각을 하다가 여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궁리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햇볕정책으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여학생들 몰래 담배꽁초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일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뱉어놓은 침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뱉어도 이렇게 많은 침을 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바닥이 하얗게 침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래! 이 애들을 교회에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모님에게 귤 한 박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담임목사는 귤을 예쁜 접시에 담아 내놓고 옆에다 재떨이 대용품으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물을 조금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침 뱉을 두루마리 휴지와 큰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고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계단에 온 분들은 이미 우리교회 식구들입니다.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이 귤도 여러분 것입니다. 먹고 남는 것은 가져가셔서 친구들과 나눠드세요.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계속 먹을 것을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모님은 가난한 지하 교회가 무슨 돈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워낙 목사님이 간곡히 부탁하니 거절 할 수가 없어 계속 공급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매일 과일이나 사탕 등을 계단에 놓아두고 정성스럽게 글도 바꾸어 써서 붙였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죠?’ ‘시험 잘 보세요!’ ‘고생 끝에 낙!’ ‘오늘은 무척 춥죠? 교회 문 열어놓았으니 커피나 컵 라면은 가스렌지를 사용해서 마음껏… ” “부활절 선물로 계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와 선물을, “친구에게도 전달, 같이 먹기 …”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은 “담배 끊어라.” “침 뱉지 마라.” “교회 나와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짧은 메시지와 끝말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들!” “기말 시험에 좋은 성적 내시기를…” 식의 격려 메모만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겨울까지 1년 동안, 특히 졸업 때에는 예쁜 꽃다발을 선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학생들도 그 때마다 “목사님 감사”, “목사님 짱~!”, “열심히 공부할게요.” 등을 써 놓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이 담배를 재떨이에, 침은 휴지에 싸서 휴지통에 넣고, 계단도 담임목사가 치우는 것보다 더 깨끗이 치우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여학생들은 목사님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습니다.
졸업 직전에 여학생들이 교회에 18억 원의 큰돈을 헌금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목사님이 너무 고마워서 ‘이가난한 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위해 한 날을 정해 모두 복권을 사고 복권에 당첨되면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봉투에 여덟 명의 이름을 써서 당첨된 줄로 믿고 약정헌금을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교회에 헌금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복권이 당첨되어 18억 원을 탔습니다. 졸업하기 전에 여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왔는데, 항공사, 백화점 등의 취업과 진학 등. 자기 신상을 일일이 다 알려주고 인사하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에 알아보니 모두 가까운 교회를 나가 주님의 일꾼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 정말 가장 확실한 최상의 전도 법이자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실현하는 용서와 이해의 삶입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말씀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와 이해의 모범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별다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잘 아는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능력을 시샘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고 간음 현행범을 잡아 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 현행범은 남자와 여자 모두 돌로 쳐서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은 예수님은 틀림없이 용서하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되고 이것을 빌미로 고발하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은 말없이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입장 곤란해서 저렇게 회피하려 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답변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시더니 간단하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앉으셔서 무엇인가 땅바닥에 글을 쓰셨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이 일어나셨을 때에는 그 여인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땅 바닥에 무슨 글을 쓰셨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땅 바닥에 글을 쓰신 것이 아니라 그 둘러선 무리들의 마음에 글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죄가 생각났고 감히 돌을 들어 여인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들통 나지 않았을 뿐이지 결국은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너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 용서와 이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성경말씀을 큰 의미로 보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또는 복과 화. 이렇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한 후에 신명기 30: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이 말씀은 구약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와 모든 인류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중요하지만 특별히 생명에 관계된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순종하는 것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 경고하셨던 말씀처럼 사랑을 회복하는 것 등등. 이런 것을 잃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잃게 됩니다. 반면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급과 연관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섬김과 봉사, 나태한 신앙생활 등. 이런 것은 고린도전서 3:10-15절의 말씀처럼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이 되어 구원은 받겠지만 상급이 없게 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개털모자 쓰고 영원한 무주택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와 이해는 어떨까요? 생명과 죽음에 관계된 것일까요? 복과 화에 관계된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21-35절에 있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21-2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 결론인 35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즉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명에 관계된 필수사항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현행범인 여인을 이해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정죄하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정죄하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면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얼마나 모질게 정죄하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한 소문만 듣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겁도 없이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들이 이해가 되시지요? 이 주제를 장황하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신앙의 선택조항이 아니라 필수조항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해와 용서가 필요한 때입니다. 온 나라가 시끄럽고 소문과 추측과 무자비한 정죄로 국가가 무너질 지경입니다.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상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제가 잘 아는 사람들의 글들도 있는데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무자비하게 정죄하는 글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표현하는 글들은 하나님께서도 들으시고 읽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13절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 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의 맺음도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인데 공감이 되어 결론으로 올립니다. 어린 꼬마가 당돌하게 선생님에게 퀴즈를 내면서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것 한 번 풀어보세요.
초등학교 4학년인 한 꼬마가 수수께끼라며 갑자기 문제를 냈습니다. "5 빼기 3은 뭘까요?" 선생님은 한참을 궁리했습니다. 넌센스 문제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슨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별의 별 생각을 다한 뒤에 "글세…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꼬마가 말합니다. “선생님, 굉장히 쉬워요. 5빼기 3은 2예요" 선생님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꼬마는 또 물었습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하! 이건 또 뭐야?'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그 꼬마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오(5)해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3)번만 더 생각하면 이(2)해가 된다.‘는 뜻이랍니다.
꼬마는 신이 나서 퀴즈를 하나 더 냈습니다. "2 더하기 2는요?" 선생님은 가볍게 알아맞혔습니다. "4지 뭐니" "맞았어요. 그럼 그 뜻은요?" 하고 되묻습니다. 또 한참을 궁리하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 꼬마는 "이(2)해하고 또 이(2)해하는 게 사(4)랑이래요" 라고 하고는 깔깔대며 뛰어갑니다.
사랑의 중요한 표현인 이해와 용서, 우리 평생에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환경과 삶 속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랑을 잘 실현하여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사랑 가득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