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 에베소서 4:17-24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 들어가는 말
신앙생활하면서 많이 듣는 말씀 중에 ‘옛 사람과 새 사람’에 관한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로부터 많이 반복되는 주제는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생활에서 실천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새사람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 주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새사람은 이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은 그 사람의 생활 자체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표현했습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보이는 실천적 삶’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사람의 삶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가 영원한 영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학에서 적응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토끼 두 마리에게 각각의 앞발에 깁스를 했습니다. 한 마리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습니다.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깁스만을 뜯어내기 위해 이빨로 갉다가 털다가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약해졌고 행동도 둔해졌습니다. 다른 토기도 역시 처음에는 깁스를 물어뜯고 털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도저히 뜯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기하고 먹이를 먹기도 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앞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의 삶이 기쁨도 감사도 생의 즐거움도 없이 어둡고 힘겹게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삽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이런 삶의 차이를 느낄 때가 있지요? 여러분은 왜 이런 삶의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까? 한 마디로 ‘결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나간 옛 삶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세상적인 옛 사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37-38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포도주나 부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가치관은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오래되어 잘 숙성된 포도주의 맛과 향기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 오래된 포도주를 마신 사람이 이제 막 담아 발효 중인 새 포도주를 좋아하겠습니까? 이 말은 ‘익숙해진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행복의 삶을 원한다면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 먼저 내 안에서 옛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어떤 상태를 옛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성경적인 의미의 옛 사람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의 삶’을 말합니다. 혹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는 중에 태어난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의 옛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기 이전의 삶’입니다. 지금 교회에 소속해 있으면서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옛 사람의 성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옛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못하고, 자신의 모든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 자신의 계획에 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는 않고 자신의 생각, 자신의 요구사항만을 나열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일이 잘 못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걱정에 싸여버립니다. 옛말에 ‘잘 되면 자기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했듯이, ‘모든 일이 잘 되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체에 속한 옛 사람의 삶을 갈라디아서 5:19-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처럼 내 안에 옛 사람의 성품과 삶의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상임신(pseudocyesis)이란 말 아시지요? ‘실제로 임신하지 않았음에도 임신했을 때의 몸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상상임신 때에 나타나는 증상은 실제 임신하였을 때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상상신앙이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예배, 기도, 찬송, 성경 읽기, 교회생활 등. 누가 보아도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상신앙의 상태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상상신앙은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지금까지 짧게 혹은 길게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내 안에 옛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내 신앙의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인터넷으로 기차 승차권을 예매했습니다. 승차권을 예매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당일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승차권 발행 창구로 가서 예매 사실을 말하고 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창구 직원이 예매 때 사용했던 신용카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현금으로 안 되느냐?’고 했지만, ‘현금으로는 당일 승차권만 구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당일 표를 구매했는데 그나마 다행한 것은 입석으로라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입석표마저 없었더라면 그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에 인터넷에서 승차권 예매에 관련된 주의사항을 살펴보니 조항 중에 ‘예매 때의 신용카드를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는 무슨 일을 할 때든지 제시하는 방법이나 조건 등을 낱낱이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믿은 증표를 내보라.’고 하실 때에 그 증표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22:11절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에게 이렇게 선고합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런 경우는 상상해서도 안 되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버림당하게 되는 옛 사람의 성품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행하는 모든 일이 옛 사람의 성품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육신대로 사는 옛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있지 않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새 사람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본문 21-24절을 봅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어떻게 이렇게 새 사람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까? 새사람의 삶이란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삶’입니다.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요소를 적고 설명하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대답이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영접, 죄, 죽음, 거듭남, 부활, 영생 등. 꼭 필요한 요소를 거의 다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가장 중요한 ‘회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새 사람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회개’입니다. 위의 요소를 전부 다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회개’가 빠지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고백하고 그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22-24절이 회개를 설명한 가장 좋은 구절입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교인들이 진정한 회개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50%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옛 사람의 행위와 성품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특히 ‘새 사람의 삶을 이루라.’는 말은 회개한 새사람의 삶이 형식적이거나 이론적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삶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불행한 영적인 상태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24-26절입니다.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사람은 자신의 옛 사람의 성품을 잘 비워냈습니다. 그 성품이 고쳐지고 청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길 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되어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한 부자가 하인과 함께 여행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흙이 묻은 신발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더러워져 있자 주인은 하인을 불러 ‘앞으로는 신발을 닦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어차피 신발을 닦아 봤자 주인님께서 나들이 하시게 되면 다시 더러워질 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습니다. 그 날 오후,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식당 주인에게 1인분의 식사만 주문했습니다. 하인은 당황해하며 ‘주인님을 모시고 다니려면 자기도 식사를 해야 한다.’며 배가 무척 고픈 시늉을 했습니다. 주인은 하인의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저녁은 먹어 뭣하나?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파질 텐데…” 하인은 아침에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흔히 등산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어차피 내려올 산 뭣 하러 올라가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렇게 안 해도 괜찮은데 별스럽다.’ ‘예수를 적당하게 믿어야지 별나게 믿으면 안 돼.’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교회 간다고, 기도한다고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여가시간에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밭에 묻힌 보화 비유’ ‘진주 장사비유’를 말씀하신 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서라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귀중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귀한 것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옛 사람의 삶을 버리고 새 사람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배 목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옛 사람의 성품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온전히 실현하는 새사람의 삶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