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3,693회 작성일 2017-06-01 15:21

***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 고린도전서 1:10-17

고린도전서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지금 현재 세계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다가 ‘미국행정부 인구조사’ 사이트 www.census.gov/popclock 를 찾았는데 실시간 미국 인구와 세계 인구를 카운터하고 있었습니다. 2017년 5월 24일 16:30 세계인구는 7,392,775,345명입니다. 이들 중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확하게 생각이 일치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가는 것을 ‘동행’이라고 하며, 함께 사업을 하면 ‘동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동행자인 부부라고 할지라도 생각이 같지 않고 삶의 방향도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진정한 동행자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각적인 의미가 아니라 ‘관점과 관심’입니다. 그래서 아모서 3:3절에서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종과 문화와 나이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동행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계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곳 즉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이 세속화 되고, 반목과 다툼으로 마음이 나누인 교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로서 대표적인 사례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런 파벌적인 분쟁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간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행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같은 곳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영의 생명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서신의 결론부분인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며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헬렌 켈러(Helen Keller) 여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 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 이 말처럼 사람은 어느 한 쪽에 관심이 모아지면 다른 쪽을 보지 못합니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4절에서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가치 있고 좋은 것을 외면하고 허무한 것을 보고 따라갑니다.

젊은 군인과 결혼해서 사막지역에 파병되어 살게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새댁은 사막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엄마,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도 싫어요.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에요.” 얼마 후, 친정 엄마에게서 아주 짧은 답장이 왔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서 철창살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단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엄마가 보내준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 새댁은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보아도 어떻게,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달라집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영적인 부모의 심정으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세상적인 권력에 물들어 교회마저 파벌을 이루어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다.’고 했으며, 13:5절에서는 결론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확증하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영적인 관심과 시각이 없으면 세상의 것, 육신적인 관심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열왕기하 6:14-17절을 봅시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더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 성읍을 포위했을 때 엘리사의 사환의 눈에는 아람 군대만 보여서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진을 친 하늘 군대를 보았습니다.

이  복잡하고 혼란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보아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3-4절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때인 이 시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별로 쓸모도 없는 것들을 보고 따르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무엇에 바빠서 그렇게 허덕이면서 살까요? 그렇게 산다고 더 행복하고 더 만족하게 될까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바빠 있지만 마치 꿈속에서 음식을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픈 것처럼 별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습니다. 학개 1:9절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이 말씀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뜻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미루면서도 자신의 집을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며 육신적인 일에 바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며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14:28-31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밤중에 갈릴리 호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로 오신 이적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서 자신도 바다로 뛰어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30절에서 “바람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베드로는 바람이 몰고 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 세상을 바라보면 베드로처럼 세상으로 빠져들어 영의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환경만 보며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본문 17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순종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맡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나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바라보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재능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최고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하여 묻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여러 개가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3-14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온전하게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화평”이라는 단어가 ‘평화, 화평, 하나 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는 하나 됨을 이루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사람들이 다른 것에 관심을 끌고 다른 곳을 보도록 유혹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였던 데일 카네기의 일화입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 대공황이 닥쳐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힘겨워하는 가운데 그의 상황도 날로 악화되었고, 마침내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는 희망이 없었던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강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그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짓고 카네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연필 몇 자루만 사 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주머니에서 1달러 지폐 한 장을 꺼내주고 다시 강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열심히 바퀴 달린 판자를 굴리며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선생님! 연필을 가져가셔야죠.” 카네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난 이제 연필이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카네기를 따라왔습니다.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남자는 그 상황 속에서도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자의 얼굴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카네기는 그 남자의 연필을 받아든 그 순간, 이미 자살할 마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훗날 카네기는 자서전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를 보고  나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연민 속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힘쓰십시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가장 짧은 명연설을 했습니다. Don't give up. (포기하지 말라) Never give up! (절대 포기하지 말라!)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주님은 곧 오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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