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 다니엘 1:8-16
다니엘 1:8-16,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11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좋아 보인지라. 16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에 의지력, 즉 한 번 생각한 것을 잘 지키는 편입니까? 아니면 환경 따라서 잘 바뀌는 편입니까?
집의 문짝이나, 자동차 문짝들이 오래되거나 잘 사용하지 않으면 여닫을 때마다 ‘끼이익’거리는 불편한 소리를 내면서 뻑뻑한 감이 듭니다. 이는 쇠붙이 사이에 부식이 일어나서 뻑뻑할 뿐만 아니라 듣기 싫은 마찰음을 냅니다. 그런데 소리를 내는 경첩이나 쇠붙이 사이에 윤활유를 뿌리면 부식도 방지하고 소리도 나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오래도록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영적인 부패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 삶에서 영적인 부패가 시작되면 불평과 짜증이 일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여 뻑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힘들게 느껴지고 염려와 원망과 피곤함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신을 돌아보면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나 기도생활이 멀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 4: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 7:13-14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서먹해지면 영적으로 부패하게 되고 하나님의 관심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생활에서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모든 일에서 원만하지 못하고 삶이 뻑뻑하고 힘들고 불협화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드럽고 형통한 삶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녀들이 부모의 관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성도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면 형통이 아니라 불통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다니엘은 주인공이 믿음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대를 침공했을 때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나이가 15세 무렵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피지배민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피지배민족 중에서 똑똑한 소년들을 선발하여 3년 동안 특별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교육을 마치면 이들을 각 족속의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최고의 예우를 했으며, 왕이 지정한 음식을 주고, 모든 쓸 것을 제공했습니다. 유대민족 중에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선택되어 바벨론 식의 특별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매 끼니의 식탁에서 율법이 금하는 음식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자신들을 관리하는 총감독인 환관장에게 ‘음식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환관장은 채식만을 요구하는 다니엘에게 ‘그 음식은 왕이 지정했기 때문에 바꿀 수 없고, 또 그렇게 하여 너희 건강이 나빠지면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왕에게 문책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다시 자신들을 맡은 관리에게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 관리들의 마음을 얻게 하셨고 허락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결과는 모든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보다 채식만 한 다니엘의 무리가 더 건강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의 요구가 받아들여졌고, 음식으로 인하여 율법을 범하는 일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며, 환관장과 관리에게도 은총을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의 인정을 받아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은 ‘벨사살’왕과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메데의 ‘다리오’ 왕에게도 은총을 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일이 형통하고 은총을 받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형통한 사람이 된 이유를 성경에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본문 8절을 봅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비록 자유롭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추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왕의 명령에 대한 거역이고 도전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는 다니엘의 결단은 그 모든 명령과 두려움도 이겨냈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섰던 것과 같았습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향한 결단은 일회성이 아니었습니다. 수년이 흘러 메대 나라가 바벨론을 점령하여 다리오가 왕이 된 때에도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메데 관리들의 시기를 사서 음모에 휩싸이게 됩니다. 메데 관리들은 다니엘의 뒷조사를 하여 왕에게 고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결점뿐만 아니라, 뇌물을 받거나, 왕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일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빌미로 삼아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절하거나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법령을 만들도록' 상소했고 음모를 모르는 왕은 어인을 찍은 금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에도 다니엘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6: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을 감시하던 메데 관리들은 왕의 금령을 어기는 다니엘을 현장에서 검거했고,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도 자신을 신뢰하는 다니엘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을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왕의 총애를 더욱 받게 하셨고, 모든 길에 형통함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심과 충만한 은혜가 베풀어집니다. 사무엘상 2:30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39:17-18절에서 하나님을 신뢰한 에벳멜렉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나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신적인 속성 중에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있습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리고 말라기 3:6절에서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바꾸시거나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사야 26:3절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히브리서 3:6절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서머나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에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즘 많이 듣는 말이 “정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라가 거짓과 불법 위에 세워지니까 온 사회에 거짓과 불법이 난무합니다. 교회마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개인이나 교회나 교단의 이익을 앞세워 거짓과 불법을 자행하면서 그럴듯한 변명으로 포장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구조가 하나님의 뜻을 지켜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질수록 믿음을 시험하는 극심한 환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만일 지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준비해두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염려하신 그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7-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다니엘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심이 대단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한 느부갓네살 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3:16하반절-18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젼시리이다. 그랗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대단한 용기이고 결단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예전에도 들려드렸던 예화 중의 하나로 결론을 짓겠습니다.
작가 ‘루이스’가 쓴 ‘악마의 편지’라는 유명한 책의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탁월한 감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노신사는 도서실을 들렀습니다. 이 책 저책을 훑어보다가 고른 것이 기독교 신앙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노신사는 책을 읽던 중에 마음속에서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노신사는 잠시 전 마음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누르고 식당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다시 그의 마음에 속삭이고 노신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악마의 유혹어린 간섭으로 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노신사의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영이 하나님을 찾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이 이 노신사처럼 이렇게 생활을 핑계로 계속 미루지는 않았습니까? 형통한 삶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춤으로 시작되고,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때에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자신의 믿음을 잘 돌아보셔서 어둠이 짙어져 가는 이 때에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밝은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