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의 이유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109회 작성일 2017-08-29 14:54


*** 흔들리지 않는 평안의 이유 / 마가복음 4:35-41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들어가는 말

이 시간의 본문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예수님의 이적 중의 하나로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이적의 내용만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다 땅을 떠나 갈릴리 호수를 건너 광야지역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일어난 광풍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며,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능력도 행하셨구나.’라고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이적의 이면에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인 혼란과 두려운 상황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유다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예수님이 건너편 이방인의 지방으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중에 생긴 일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 있는 지방들은 오늘날은 거의 황폐해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만 해도 지구상에서 번화하고 아름다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이 호수 근처에 있는 도시들 중에서 ‘디베랴’가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또 이 호수는 서쪽 해변으로 뻗어 있는 평원의 이름을 따서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지역은 ‘하나님이 만드신 유일한 비옥 지대’ 라고 평가할 마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남북으로 800㎞, 동서로 400㎞ 정도 되는 넓은 지역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갈릴리 지방에 204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집정관이었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204개의 도시 중 인구 15,000명 이하 되는 도시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척박한 광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불순종은 자연조차 황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황폐한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악하게 하며, 요란함과 혼란스러움으로 들끓게 합니다.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뒤숭숭합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숭배하고, 과학을 숭배합니다. 이러한 세상에는 느닷없는 전쟁과 싸움의 광풍이 불어 닥치며, 온갖 어지러운 사상의 파도가 덮쳐옵니다. 사람들은 이 혼란스러움을 피하려고 일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술과 마약과 온갖 오락과 육체적인 쾌락으로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결코 인생에 평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자란 노련한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광풍과 파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노력으로 이 광풍과 파도를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만 더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심에도 그들은 그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고, 한 마디 도움만 요청하면 해결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떠는 어리석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풍랑으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실 수 있었는데, 제자들은 왜 그렇게 두려워했겠습니까?

※ 사람의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평온합니까? 그 평온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입니까? 요한복음 14:2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이 세상의 어떤 혼란과 두려운 일에도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세상에서 살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안이 없겠습니까?

세계 최대의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인 You Tube에서 몰래 카메라로 큰 인기를 얻는 ‘코비 퍼신(Coby Persin)’이라는 사람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온 몸을 돈으로 도배한 한 남성이 거리에 서 있습니다. 그 남성은 ‘Take What You Need'(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양복을 입은 한 신사가 다가오더니 남성의 몸에 붙어 있는 지폐들을 골고루 떼어갑니다. 이어서 조깅하던 한 남성은 믿겨지지 않는 듯 몇 장을 조심스레 떼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한 차림의 여성은 명품 백까지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성의 몸에 붙은 돈을 정신없이 떼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이 물었습니다. “루이비통 백까지 메고 있는 데도 돈이 필요합니까?” 여성은 “난 내일 네일아트를 받아야 해서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반전이 일어납니다.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가 돈을 붙이고 서 있는 남성을 발견하고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남성의 몸에 붙어 있는 지폐를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달랐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 두 장 즉 2달러만 떼었습니다. 남성이 말했습니다. “필요한 돈이 그게 다 입니까? 더 가져가도 됩니다.” 노숙자는 “2달러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실험을 마치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도 보이는 돈을 가난한 사람이 더 허겁지겁 가져갔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영상 속의 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욕심은 가지고 들수록 끝이 없습니다. 내 안을 끝없이 채우기 전에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실험에서 보인 것처럼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6: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늘날 세상이 평안을 잃어버리고 파멸로 치닫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자연을 파괴한 것도 인간의 탐욕과 욕심 때문이며, 파괴와 전쟁과 살인의 이유도 인간의 욕망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탐욕이 일어나면 평안이 사라지고 진리와 영에 대한 관심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대한 것을 ‘씨 뿌리는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앞의 18-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세상의 욕망으로 채워지면 영의 삶의 평안은 사라지고 육신의 삶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본문 35-36절을 봅시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예수님께서 유다지역의 갈릴리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를 떠나서 이방지역으로 가셨을까요?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런데 유다지역을 떠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14-15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26-27 상반절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 즉 예수님께 나아왔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무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육신적인 생각에만 골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그렇게 많이 보고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는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니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풍랑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예수님이 곁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영의 삶이든지 육신의 삶이든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 평안을 누리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는 길 뿐입니다.

본문 3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은 의아했습니다. 선생님이 마치 사람에게 명령하듯이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놀란 표현을 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의아해 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이적과 능력을 경험했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신분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창조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 즉 어떤 환경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창조주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뿐임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요한일서 5:4절을 봅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인으로, 창조주이시며, 모든 일을 역사하시는 주권자로 믿는 믿음, 내 안에 거하시는 참 주인으로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갑자기 불어 닥친 풍랑 가운데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뱃전에 누워서 평안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여러분, 쪽배를 타 보셨습니까? 작은 쪽배는 풍랑이 일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파도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만큼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 울릉도로 갈 때에 탔던 배가 청룡호라는 350톤 급의 여객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파도가 그리 높은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속에 있는 것 다 올리고 어지럼증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와중에도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호들갑을 떨 때에 주님은 조용히 일어나셔서 바다를 꾸짖으시며 잔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창조주가 계시는데 어떤 피조물이 창조주의 평안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원한다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삶의 풍랑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은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5:9-10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순종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며, 주님도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be free Israel이라는 유대인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신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는 무신론자들입니다.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유대인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91년에 갤럽조사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이 동독 88%, 러시아 27%, 영국 14%, 미국 1%, 이스라엘 26%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의 조사에서는 이스라엘의 무신론자들이 65%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날마다 긴장과 테러와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삽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고, 내 삶에 세상의 욕망으로 채우면 평안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염려와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이루십시오. 그리하여 앞으로 어떤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주님 안에서의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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