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하는 선택
*** 확신하는 선택 / 열왕기상 18:16-24
열왕기상 18:16-24,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말씀은 선지자 엘리야와 우상인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대결로 알려진 ‘갈멜 산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이야기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이 시대의 방황하는 영적인 모습들이 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요구하시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잔뜩 품은 화산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평온하고 진취적인 듯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불안과 불만의 응어리 진 것들과 이기적인 욕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벙어리 개처럼 자신의 일을 잊고 있으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어떠한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56:10-12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지금 이 시대에 꼭 맞는 말씀입니다. 바로 코앞의 일도 모르면서 어리석은 세상 적 확신에 빠져 있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주립의과대학의 심장 전문의사인 ‘스미스 윌리엄’(Dr. Smith William) 교수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 마비로 쓰러졌습니다. 즉시 병원 응급실로 옮겨 산소호흡을 시키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하여 그를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때 스미스 박사는 이미 자기 몸 밖으로 나왔습니다. 스미스 박사는 자신을 치료하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기 몸은 흰 천으로 덮여지고 의사들은 치료를 중지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자기 아내가 애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스미스 교수는 곧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미스에게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장면은 자신에게 심장내과를 공부하는 한 의대생이 그에게 심장에 관해 연구한 것을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을 향하여 야단을 치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에게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뭐, 이것도 리포트라고 가져왔는가? 집어치워. 너 같은 그런 머리로는 의사가 될 수 없어…”
그 학생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학생은 좌절하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병실이었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 앞에 서서 인자한 얼굴로,
“지금은 많이 아프지만 곧 괜찮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라고 위로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환자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는, “박사님,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아주 인자한 모습으로 또 다른 환자에게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미스야, 잘 보았느냐? 이것이 너였느니라. 한 번 다시 기회를 허락한다. 세상에 가서 잘 살아봐.”
스미스 박사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죽음과 죽음 후의 심판을 경험하고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때는 교만했지만 이제는 겸손해져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되었고, 특히 자기 학생들을 극진히 잘 지도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현재 스미스 교수는 ‘의사들이 어떻게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한 주제에 관한 수많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재림’을 헬라어로 parousia(παρουσια)라고 하며, ‘출현’, ‘강림’, ‘재림’등의 의미하는데, ‘재판관이 방문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즉 다시 오실 주님은 ‘재판관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이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아합 왕은 사람 됨됨이가 나약하여 왕후인 이세벨의 간섭을 많이 받았고 특히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을 짓고 섬겼습니다. 이러한 왕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제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본문 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줏대 없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어정쩡한 생활을 나무란 것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먹고 살자니 권세가 무서워 바알에게 절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신사참배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영적인 방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확신하는 선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갈멜 산에서의 영적인 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따르는 북 이스라엘을 삼 년 동안의 가뭄으로 징계하셨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찾으려고 온 나라와 이웃 나라까지 뒤지고 다녔습니다. 삼 년이 지난 후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의 궁내 대신인 경건한 오바댜에게 나타나서 아합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아합을 만난 엘리야는 ‘이 가뭄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우상을 따른 당신 때문이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에 누가 진정한 신인지를 밝히자고 제안했습니다. 아합의 명령에 의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 명을 갈멜 산에 모으고 또 모든 백성들을 불렀습니다. 영적인 줏대 없이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엘리야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제단을 쌓고 기도하여 불을 내리는 신이 참 하나님임을 밝히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바알을 위해 쌓은 제단에는 그 많은 선지자들이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홀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아주 짧게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이 대결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고 확신하는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 지금은 자신의 삶을 확신 있게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옛말에 “재주가 많으면 굶어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어느 한 방향을 목표로 달려가지 못하고,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하다가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함을 일컫습니다. 영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세상에도 마음을 두고 하나님께도 마음을 두는 두 마음을 품은 줏대 없는 선택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6-8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특히 지금 우리의 시대는 결단 요구되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더욱 확신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2:10-11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를 사는 사람들이 각자가 확신하는 삶의 일을 계속 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즉 이제는 돌이킬 시간조차 제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달려야 할 목표점은 “부름의 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뜻을 이루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6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아주 짧은 이 말씀은 ‘기회’와 ‘일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소중한 교훈입니다. “세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kairos’이며, ‘기회’, 즉 ‘정해진’ 또는 ‘적당한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hemera’이며, ‘낮’ 즉 ‘새벽부터 저녁까지의 시간대’를 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악하다”는 말은 ‘죄’ 혹은 ‘사탄’을 의미하기도 하며, 특히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악’을 말합니다. “아끼라”는 말은 ‘사다’, ‘기회를 이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전체 의미는 ‘우리가 지금 일하는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며 죄가 만연한 시기이므로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제한이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에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는 ‘기회’라는 것은 더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영이 깨어있어야 하며 확실하게 붙잡고 선용해야 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고 했습니다. “게으르게 행한다.”는 말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며 무질서하고 산만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의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목표를 위하여 걸림이 되는 것들은 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옛 사람의 것들을 버리기가 아쉬워 망설이게 되면 새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로 인하여 받아들이기를 망설인다면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영이 혼탁해져서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명합니다. 이렇게 행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확신하는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엘리야의 제안에 “그 말이 옳도다.”라며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게 확신하는 선택의 본을 보였습니다. 빌립보서 3:13-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말씀에서 주목할 단어는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12절과 14절에 나오는 ‘dioko’라는 단어는 ‘추적하다.’라는 말인데, ‘사냥개가 사냥감을 발견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추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 목적을 향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추적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동물은 시속110Km를 달리는 ‘치타’입니다. 치타가 세랭게티 초원에서 ‘톰슨가젤’을 사냥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치타는 톰슨가젤 무리 중에서 적당한 사냥감을 물색합니다. 표적이 정해지면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합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먹이를 향하여 돌진합니다. 수많은 가젤들이 옆을 스치지만 치타는 오로지 표적을 향해서만 전력 질주합니다.
예전에 동아일보 사회면에 ‘직장인 업무애착도 한국 꼴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다국적 여론조사 전문 업체인 ‘테일러넬슨소프레(TNS)'가 전 세계 33개국에서 일하는 직장인 2만여 명에게 “당신은 지금의 일과 직장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한국 직장인은 모두 638명이었고, 현재의 업무에 애착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36%로 33개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습니다(1위-이스라엘, 일72%, 직장68%/ 미국, 일61%, 직장49%). 직장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35%로 일본(30%), 불가리아(34%)에 이어 31위를 나타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회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삶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고 느끼기에도 ‘차갑다.’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신앙을 회복하고, 열정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시며 확신하는 선택을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탁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선택의 길을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