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망덕한 시대를 살면서
*** 배은망덕한 시대를 살면서 / 마태복음 11:20-30
마태복음 11:20-3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나온 자취’를 말합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반성을 할 줄 알며 자기성찰(自己省察)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6: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잘 못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런 사람들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고 자신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자기성찰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표현 하겠습니까?
얼마 전 인터넷에 중국의 ‘류한’ 회장의 수기가 올라와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류한 회장은 7조원 상당의 재산을 가진 부호로서 중국 부호 148위에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직폭력의 두목으로 살면서 경쟁상대에 있었던 인물 8명을 살해하는 등 갖은 수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해왔습니다. 결국 꼬리가 너무 길어서 공안당국에 검거 되었고 11개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류한 회장은 사형 집행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족 면회에서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내용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울면서 가족들 앞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이 너무 컸다.”
류한 회장의 회한(悔恨)처럼 우리 인생들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일찍,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을 살피고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십니다. 이사야 55:6-7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은 ‘자신을 살펴 악한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이사야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하나님을 점점 더 멀리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전쟁의 폐허에서 일으키시고 이렇게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본문 20절 말씀의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한”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런 배은망덕한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확실히 인간은 간사합니다. 급하면 친척 찾고, 친구 찾고, 이웃 찾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선배 목사님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어느 목사님이 “아이고, 나는 새벽기도회 때에 오지 않던 사람이 나오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해서 모두가 공감하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급할 때에라도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급할 때 세상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급할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항상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신명기 24:18절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그리고 이사야 46:9-10절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특히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인생들은 은혜는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 시대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도, 감사하는 것도 잊어가고 있습니다. 60-70년대만 해도 입을 것,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아서 먹고살기도 힘들었지만 꽁보리밥을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했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도 마음만은 풍요로웠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탐욕스러워져서 하나님의 은혜도 잊었고 감사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이니, 추수감사절이니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듯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교회 재정 충당이 더 큰 목적인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의 배은망덕에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세 성읍은 모두 갈릴리 호수의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라셨던 나사렛도 이 성읍들보다 남쪽에 있는 갈릴리 지역의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고라신’, ‘가버나움’, ‘벳세다’와 같은 도시에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과 가까운 이들 고을들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으셨던 것입니다. 당시의 갈릴리 지역은 낙후되고 소외되고 멸시받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입은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가버나움 (마 8:5-13,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심/ 마 8:14,15,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치심/ 마 8:16, 귀신을 쫓아내심/ 마 9:20-22, 혈루병 여인을 고치심/ 마 9:23-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마 9:27-31, 두 소경을 고치심/ 마 17:24-27,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돈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심/ 막 2:1-12, 중풍병자를 고치심 - 벳세다(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의 고향)/ 마 14:15-21, 오천 명을 먹이심/ 마 14:25-33, 바다 위를 걸으심/ 막 8:22-26, 소경을 고치심) - 이러한 기적의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주변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소문이 난 사건들입니다. 만약 이러한 이적을 소돔이나, 시돈이나, 두로와 같은 이방 도시에서 행하셨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여 멸망을 피했을 것이라며 예수님이 탄식하셨습니다(소돔, 시돈, 두로는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당한 도시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6:4-6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외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길은 막혀버립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며 감사합니까? 아니면 혹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조차 전혀 생각하지 못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배은망덕하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 가정에, 교회와 민족과 나라에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에 사는 ‘맛지족’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내 머리가 흙 속에 있습니다.’ 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은혜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표할 때, 자기 머리를 땅에 닿기까지 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머리가 흙 속에 들어갈 만큼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주둥이를 닦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입을 싹 씻는다.’ 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시치미를 뗀다든지 혹은 모르는 척 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만 하는 것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자세가 ‘순종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으로는 진정한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우리가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준비하여 ‘별 것 아니지만 마음의 표시입니다.’라고 할 때에 진정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23:15절을 봅시다.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무교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것은 ‘진정한 마음의 표시를 행동으로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본문 25-26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계시를 받는 자”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은혜로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배은망덕하게 변해가는 이유는 육신의 욕망과 생존경쟁에 찌들기 때문입니다. 즉 먹고 살기에 바쁘고, 세상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에 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본문 28-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무거운 짐들, 욕망의 짐, 고통의 짐, 모든 삶의 짐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짐을 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생의 고통과 번민과 원망이 더 가까이 느껴집니다. 내가 지금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나 감사가 생각나겠습니까? 인생의 짐이 내려지면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은혜로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실 때에 우리의 생활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진정한 주인이 되시도록 합시다. 모든 일을 주인에게 아뢰며, 주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주인 된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고 경험되어 질 수 있도록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합시다. 그리하여 이 배은망덕한 시대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