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만족한 삶
***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만족한 삶 / 고린도후서 3:1-11
고린도후서 3:1-11,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운가요? 만족스럽지 않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만족(滿足)을 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욕심이 더 많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만족할 때 평안을 느낍니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프지 않고 배부르도록 먹고 나면 엄마 품에서 평온하게 잠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2018년에 어떤 만족을 추구합니까?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만족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본문말씀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하십니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에 등장하는 ‘소냐’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창녀였으며, 쓰레기통과 같은 그런 환경에서 인간쓰레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풍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냐를 ‘거룩한 창부’라고 불렀습니다. 지성인의 상징적 인물로 나오는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남에게 백해무익한 사람의 돈을 빼앗아 훌륭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대상으로 삼고 노파와 그의 선량한 동생까지 살해합니다. 이러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그리스도의 향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만족은 무엇을 추구하고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만의 독특한 삶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향기는 냄새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향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착하다” 또는 “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 “부지런하다”, “게으르다”, “타고난 일꾼이다”, “눈치꾼이다” 등등. 이러한 인생의 향취는 그 사람의 삶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족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표징은 행복감과 기쁨과 감사입니다. 이처럼 만족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취가 사람을 감동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즉 고린도교회 성도 자신들이 바울의 진정한 편지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의 복음적 삶의 결실이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결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삶을 이루기를 원하시겠습니까?
※ 진정한 만족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만족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생명체마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행복지수에 대한 통계를 내는 곳이 있습니다. OECD의 국민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2015년 27위/36개국), 미국갤럽의 국가별 행복도 설문조사(2016년 57위/157개국), 유엔 SDSN의 세계행복보고서 (2016년 57위/157개국), 유럽 신경제재단(NEF) 지구촌행복지수(Happy Plane Index) (2016년 63?위/151개국) 이들 기관들은 산출조건이 다릅니다. 유럽 신경제재단에서 낸 통계는 주로 남미 쪽이나 삶의 질이 낮은 나라들이 상위권에 있습니다. 2015년에는 100점 만점에 89점을 차지한 파라과이가 1위를 차지했고, 콜롬비아(84), 에콰도르, 과테말라, 등의 순이었고 우리나라는 59점으로 조사대상 143개국 중에 118위였습니다. 2016년에는 1위 코스타리카, 2위 베트남, 3위 자메이카 등 역시 저성장 국가들이 상위권에 있습니다. 유엔이 조사한 2016년 통계는 유럽지역이 휩쓸었습니다. 덴마크, 스위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캐나다, 네델란드, 뉴질랜드, 호주, 스웨덴 등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을 느끼는 만족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만족 조건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진 조건과 똑 같지는 않습니까? 성경에서도 가룟 유다 같은 제자는 그의 만족 조건이 돈에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기에는 높은 자리가 만족의 우선순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좋은 동역 자였던 데마도 만족의 조건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여 결국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아마 더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찬송으로, 복음송으로, 기도로 ‘주님만을 사랑한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돈이나 물질, 사람, 권력 등을 더 의지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무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의 조건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에 두기 때문에 영적인 무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에 대한 일화가 많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할 때에 시무장로이기도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의 검소함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무명으로 만든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절약하려고 단추를 달아 입었고, 모자도 대를 이어 쓸 수 있도록 말총으로 튼튼히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조만식 장로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어느 졸업식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학교의 설립자인 이승훈 선생이 조만식 장로의 초라한 모습을 내빈들에게 보이기가 거북하여 ‘졸업식장에서만이라도 예복을 입으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때 조만식 장로는 “교장 노릇을 못하면 못했지 없는 것을 어떻게 입느냐.”고 하면서 평상시의 차림새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늘 신고 싶었던 구두를 사오자 그것을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공부를 위해서는 아까울 것이 없으나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는 용서할 수 없다.”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무작정 구두쇠로 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분과 분수에 걸맞은 삶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본문말씀처럼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즉 영의 직분이며 의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직분에 걸맞은 믿음을 가져야 하고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봅시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의의 직분, 영의 직분에 걸맞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진정한 만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가 있으니 당연히 그 새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삶을 살면 진정한 만족의 삶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이루고자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내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읽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조만식 장로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기웃거리고, 분수에 지나도록 사치하며 외모를 가꾸는 것이나, 세상 적인 것으로 만족의 조건을 삼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만족의 조건은 의의 직분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 하고 행복을 추구한다면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만이 나의 만족이고 행복임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남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는 남 왕국의 멸망 직전에 통치했던 왕입니다. 14대 왕이었던 므낫세의 전무후무한 우상숭배로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마침 성전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율법 책을 발견하여 요시야 왕에게 가져왔고 왕이 읽게 했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왕이 옷을 찢고 사람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물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대하 34:27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의 죄가 너무 커서 다시는 돌이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보았던 요시야 왕에게만은 긍휼을 베푸셔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만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만족한 삶이 됩니다.
※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직분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만족’이라는 말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말씀에서처럼 ‘만족’이라고 하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의 “만족”이라는 단어는 ὶκανός(이카노스)인데, 이 단어는 ‘도착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세부적인 의미를 보면 시기적인 면에서 마치 때에 맞춰 도착하는 ‘유능함’ 양적인 면에서는 ‘넉넉함’ 성격적인 면에서는 ‘적당함’ 을 뜻합니다. 이는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흡족해 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만족과는 차이가 있습니까? 이처럼 다방면에서 흡족해할 만한 요소를 갖춘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흡족해 할 만한 모든 요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만족의 요소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5: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는 것도 역시 한 개인의 계획이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분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직분은 영의 직분이며 영광스럽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 말씀에서 말하는 “정죄의 직분”은 ‘율법을 행하는 직분’이며, “의의 직분”은 ‘복음 즉 생명의 직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 직분은 모두가 복음의 직분, 즉 생명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이 직분의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세상 사람들의 만족은 육신적인 것에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생명의 직분 속에서 주어집니다. 즉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에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의 직분에 충실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를 진정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으로 채우고 싶다면 모든 조건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직분, 즉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하면 본문 6-11절에 있는 말씀처럼 영의 직분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영광된 삶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2018년 한 해, 우리 모두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민족이 하나님의 영광된 삶을 이루는 복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