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사람
*** 꼭 필요한 사람 / 빌립보서 2:19-25
빌립보서 2:19-25,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 들어가는 말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여러 학생들의 여러 대답 중에서 어느 학생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학생이 학교에서 남다른 성적을 낼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겠지요. 그 학생은 만인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또 자기가 받은 장학금으로 부모를 돕고, 형제들에게 인심 써 가면서 공부했습니다.
언젠가 택시를 탔을 때, 그 운전기사는 ‘운전이 한없이 즐겁다.’고 말했습니다. 그 기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이 즐겁고, 사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으로 비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그저 죽지 못해 살지요.”라고 대답할 때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다면 대단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요리문답 1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사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에스라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모두 울었습니다. 그 때에 에스라와 제사장들과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느헤미야 8:10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37: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구절이 요한복음 16:22절과 24절에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4절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짧고도 강렬하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모든 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며 즐거워함으로 행하는 것은 주관자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표가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백한 내용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박국 3: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삶의 환경은 도저히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지만 오직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의 빌립보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 소망과 기쁨을 전하고 고난까지도 은혜로 받아 능히 이겨내도록 격려합니다. 그래서 1: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초대교회의 신실한 사역자 두 사람에 대하여 대단히 신뢰할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디모데는 일찍이 사도 바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써 또는 목회자로써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아 있도록 하여 사역을 맡기기도 했습니다(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또 한 사람인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로 표현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로서 교회의 대표로 바울에게 모은 헌금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을 특별하게 언급한 것은 이들이 신실한 신앙인으로써 본이 되며,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러면 오늘 나는 하나님께나 교회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일까요?
※ 꼭 필요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0-22절을 봅시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뜻을 같이 한다.”는 말은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여 하나님을 등한시 할 때에도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즉 디모데는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등불은 어두운 곳에 필요하고, 소금은 맛을 잃은 곳에 필요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디모데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을 위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3:3절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했습니다. 마음 맞지 않는 사람이 동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한자에서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했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교회에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함께 일을 해 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하자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말에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한 성령을 통하여 세례를 받고, 은사를 받고, 한 몸(교회)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1-13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3-6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꼭 필요한 사람은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본문 22절을 봅시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리고 30절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디모데의 신앙은 말씀 그대로 연단에 의하여 얻어진 신앙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처럼 디모데는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함께 복음 전파에 힘썼으며, 늙은 바울을 아버지 모시듯이 정성껏 섬기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돕는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결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일생동안 자신의 일만 구하다가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고, 일평생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고통에는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도 정말 많습니다. 지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확산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곁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오히려 자신이 그 일에 휘말릴까 두려워하여 피하는 시대입니다. 사랑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마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어 고통을 주는 일마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이런 이기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10:30-32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7-8절에서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습니다. 당시 생존자였던 타이타닉호의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숨겨 두었던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 래히틀러’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되었다. 그가 쓴 회고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선장은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많은 여성 승객들은 가족과 이별하느니 차라리 남아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 라고 소리쳤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몇 명 없었습니다. 당시 타이타닉에 탑승하고 있었던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 애스터 IV 씨는 임신 5개월이었던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웠습니다. 그는 갑판 위에 앉아 멀어져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사랑해요, 여보!”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있던 선원은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죠.” 그는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스 로잔에서 열린 생존자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했습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라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 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겼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여성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 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는 법입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는 여장을 한 채 구명보트에 탑승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바로 퇴직 당했으며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십 여 년 뒤에 후회와 수치로 점철된 삶을 마감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런 멋진 인생이 왜 요즘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울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런 멋진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능력의 주님이 계시고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7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일에 마음 두지 맙시다.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며 변함없는 삶으로 주님께,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