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 누가복음 4:25-30
누가복음 4:25-30,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 들어가는 말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아마도 긴 연휴 동안 다른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은 일도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마음이 훈훈해지는 좋은 일입니다. 더욱이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며 행복한 일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영어로 Grace라고 하는데 신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발적이고도, 제한 받지 않는 사랑의 선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그 많은 죄악과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 주심’을 말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에는 잘되고 형통한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과 아픔까지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은 영의 생명을 유지하고 더 나은 상급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119:71절에서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마저도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자라나신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본문말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본문 25-27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이 말씀에는 두 시대에 일어났던 두 가지 큰 사건이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의 긴 가뭄 때에 음식이 없어 고통당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오직 이방인이었던 시돈 땅 사렙다의 한 과부만 풍족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사렙다는 ‘사르밧’이라고도 하는데 지중해 연안마을로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으며 현재의 지명은 사라펜드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후계자였던 선지자 엘리사 때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만 역시 이방인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셨고 나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을 빗댄 말씀에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위대한 선지자이며, 북왕국 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때에 사역했습니다. 아합 왕은 이방 나라 시돈 왕의 딸인 ‘이세벨’을 왕후로 삼아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징계로 온 이스라엘에 삼년 육 개월 동안 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온 땅이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궁핍한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방의 사르밧에 있는 한 과부뿐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마지막 한 줌의 밀가루로 떡을 구워 외아들과 함께 먹고, 그 후에는 죽기를 기다려야 하는 절박한 때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열왕기상 17:12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그나마 그 마지막 떡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그 떡을 드렸습니다. 그 후 양식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가루 항아리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인 엘리사 시대에는 이방나라인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는데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계집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계집종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왕하 5:3)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아이의 말을 믿고 왕의 허락을 받아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그 시대에 유일하게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만이 은혜를 입어 나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이야기에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이 두 사건에는 사르밧의 과부나 수리아의 나아만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를 만났을 때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며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선지자임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이라는 표현은 그 여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 17:14)는 말씀을 믿고 마지막 음식을 내 놓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의 노예인 계집아이가 전한 말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 선지자에게 홀대를 당한 나머지 화가 나서 돌아가려 할 때에 자신의 하인이 충고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그가 겸손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결국 엘리사 선지자가 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근 결과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나병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순종!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실행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자존심 강한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실행하기 너무 어려운 말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순종하지 못 함’에 있습니다. 적극적인 거역이거나 불순종은 아닌데 자기 생각과 자신의 뜻을 내려놓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여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불순종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요구하시는 뜻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과 거역에 대하여 단골로 사용되는 사무엘상 15:22-23절을 봅시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이 말씀 하나만 기억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여섯 번째 복인 요한계시록 22:7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영원한 생명 얻기를 원하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실행하십시오.
※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사르밧의 과부, 수리아의 나아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르밧의 과부는 후에 자신의 독자가 죽는 고통을 당했지만 또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엘리야를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 일을 겪은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왕기상 17:23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여인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아만의 고백도 봅시다. 하나님의 명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서 깨끗함을 받은 후에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왕기하 5:17절입니다.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은혜를 입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어느 여름날의 한 낮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행인이 잠시 쉬어갈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더위에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마침 가지가 무성한 커다란 오리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 나무 그늘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던 가슴이 열리고 이마의 땀방울이 식어가자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여보게, 나무란 원래 대부분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법인데 여기 이 오리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정말이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진 게 이 나무라더군.”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 정말 쓸모없는 나무야.”
두 행인은 지금 이 오리나무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무더위를 시원하게 피했건만 그 은혜를 잊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했겠습니까? 시편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중요한 절기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일일이 되짚으면서 감사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저 역시 기도 중에 많은 부분이 하나님께서 나와 가정과 교회와 민족에게 베푸신 은혜를 일일이 되짚으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호세아 4: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우리 자녀를 잊어버리십니다. 그러나 시편 50:14-15절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십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깃불을 주시고, 전깃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한 여성이 종신 금고형을 받아 평생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속에서 예수를 믿고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시(詩)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하늘을 날지 못하게 하시었네. 나는 이 좁은 새장의 한 마리 새, 주님이 나를 가두셨네. 나 할 일 없기에 종일 노래하노라. 찬송하노라. 찬송 외에 달리할 것 없네. 찬송하라고 나 여기 가두셨으므로 나의 영은 주를 향해 종일 찬송하네. 십 배로 찬송 부르네. 백배로 찬송 부르네. 찬송하며 눈을 뜨고 찬송하며 잠들고 찬송하며 숨지리라.”
감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여 높이며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삶의 요소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어서, 웃을 일이 없고 짜증과 한숨으로 지낸다고 한들 무엇이 더 나아지겠습니까? 여러분의 지금 환경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연속입니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해 보십시오. 불평하며 원망하고 짜증내지 말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십시오.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순종과 감사,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순종과 감사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