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따르십시오.
*** 약속을 따르십시오. / 여호수아 3:1-8
여호수아 3:1-8, “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킵니까? 약속의 대상이 누구이든지 또는 어떤 상황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약속을 잘 지킵니까?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년11월9일~1938년3월10일)를 아시지요? 그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입니다. 그의 일생의 좌우명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농담일지라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좌우명의 철저한 실행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안창호 선생의 상해 망명시절에 한 동지의 열여섯 살 된 아들의 생일 축하 자리에 참석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경찰이 안창호 선생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 사실이 일본경찰에게 알려졌습니다. 일본경찰이 그 집 주변에 잠복했습니다. 한편, 안창호 선생의 주변 사람들은 “선생님, 이번에 가시면 체포되십니다. 애들 생일축하 자리인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십니까?”라며 그 집에 가는 것을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은 “그래도 가야 하네.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네.”라며 그 아이의 생일 축하를 위해 갔다가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약속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상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약속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전체가 약속입니다. 우리가 구약(舊約)성경, 신약(新約)성경이라는 명칭 그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출발점도 약속이 기초입니다. 창세기 17:1-2절을 봅시다.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7절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이 구약의 핵심인 이스라엘의 시작점입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9-14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이 새로운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이스라엘의 시작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압 평지를 출발하여 요단을 건너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과 연단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이제는 불순종했던 60만 명의 장정들이 모두 죽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2년이며 모든 과정을 마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을 40년 동안 징벌과 훈련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제 40년 전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그 자녀들이 자라서 약속의 땅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하나님의 언약궤가 출발하면 그 뒤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 내일이면 그토록 기다리던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지켜야 할 사항을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도 백성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들이 머물던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며,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입니다.
※ 우리 삶에서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약속이 기초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약속은 생명에 관한 약속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언약궤를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약속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25절에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요한복음 5:24-25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이란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떠나 영이 죽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생명이 회복되고 살게 됩니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를 구원하신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우리를 담대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한참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번은 마귀가 루터를 찾아와서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너 자신도 죄인이면서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은 루터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자신의 죄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는 의롭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이단인 구원파에서도 성도들을 미혹하면서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만일 의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의인이 되었느냐고 따지고,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이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의 수법입니다. 이 때에 그리스도인이 대답해야 할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이신칭의’입니다. 즉 루터처럼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성령께서 거하시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존재도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8:34-39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39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담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사탄을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 어떻게 약속을 따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삭과 야곱을 이어 이 때까지 언약의 백성의 길을 살아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친히 임재하시는 언약궤를 앞세워 그 약속을 시행하려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언약궤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3:10-14절을 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말씀대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이렇게 약속을 따른다는 것은 약속을 이루어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약속이 이룰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제어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함락해야 했듯이 우리도 넘어야 할 험난한 길이 많습니다. 그래서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고,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에 이르는 날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갑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삶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약속에 이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세상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뒤를 따릅시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