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으로 삽시다.
***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 빌립보서 3:10-16
빌립보서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이자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소망인 부활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뿐이라면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내하며 진리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음 구절인 20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즉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름답고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부활한 영의 생명으로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두고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지켜가야 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1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마음도 몸도 따라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명언 중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고, 마음이 가는 곳으로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됩니다. 즉 진정으로 부활을 소망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활신앙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 생명의 길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부활신앙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간 첫 성이었으며, 유럽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초청을 받고 유럽에 건너가 최초로 세운 교회였습니다(행 16:11-40). 그 곳에서 얼마의 제자를 얻었지만 박해로 감옥에 갇혔고, 찬송 중에 기적이 일어나서 감옥을 나오기도 했습니다(행 16:16-26). 그 와중에 간수의 온 집안에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는 등 바울에게는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전도 여행 때에도 들렀고, 다른 교회에서는 물질적 원조를 받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은 기꺼이 받았습니다(빌 4:15-18).
이처럼 사도 바울은 친밀한 교제를 하던 빌립보 교회에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내용 중에는 ‘기뻐하다.’는 단어가 무려 16회나 사용되었고,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내용이 21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내용은 바울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였으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부활신앙입니다.
※ 부활신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1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할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은 부활신앙의 근본원인을 말씀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은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면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너도 이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본문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곧 세상을 따르던 옛 사람의 죽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가사로 된 복음송(1249)을 불러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이 고백처럼 지금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지금 나는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인 나는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이 고백과 함께 우리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완전한 부활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부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신의 부활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가 옛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주셨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대신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영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영의 부활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의 부활을 이루어 영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육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죽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 육신도 부활할 것입니다(고전 15:51-52). 만일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죽음을 보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완전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고전 15:51-52).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 그러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10-12절을 봅시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도 온전한 부활의 삶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 13-16절을 봅시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사도 바울도 자신은 아직 완전한 부활의 삶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부활의 삶을 푯대로 삼고 달려간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도 계속적으로 부활신앙의 삶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이 살아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 ‘아무 곳이나 무덤이 많은 곳에 가서 무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욕도 하고 칭찬도 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성도가 저녁 무렵에 다시 목사님에게 와서는 무덤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성도님이 그 무덤에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니 그들이 화를 내던가요? 그리고 칭찬을 하니 좋아하던가요?” 그러자 성도는 “목사님 그들은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 “내일은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나 잡고 욕을 해보고 오십시오. 그러면 내일은 영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 성도가 흥분한 상태로 목사님께 왔습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아무에게나 욕을 해보라고 해서 욕을 했다가 뺨만 맞았다.’고 하면서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칭찬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하던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을 했다가 맞은 이유는 당연히 그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죽은 사람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도 반응이 없으며, 어떤 영적인 일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자신의 죄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세상의 죄악을 볼 때에 가슴이 쓰린 것은 그 영이 살아있다는 표가 됩니다.”
에스겔 9: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는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기관 천사에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천사들에게 ‘서기관 천사의 뒤를 따르면서 이마에 표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고 표가 없는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영이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구별됩니다.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게 되며 세상의 죄악을 보면서 탄식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으며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일에 반응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20-21절을 봅시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나타내는 삶입니다. 부활절 하루만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365일 매일 매 순간을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신앙의 삶이 그러하지만 특히 부활신앙은 생활 속에서 실천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뵈올 수 있고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습니다. 이제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일에 반응하는 부활신앙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