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키십시오.
*** 자신을 지키십시오. / 로마서 14:1-12
로마서14:1-12,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들어가는 말
두 친구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옆의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는 왜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냐?” 그러자 그 친구가 의아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수염을 기르다니? 나는 수염을 기르지 않아.” 물었던 친구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친구에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는 귀찮아서 면도를 하지 않은 것뿐이야.” ㅋ여러분, ‘수염을 기르는 것’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두 말은 같은 말 같지만 분명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컨대, 물 반병을 보고 한 사람은 ‘물이 반병 밖에 안 남았네.’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물이 아직도 반병이나 남았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똑 같은 물 반병이지만 두 사람은 보는 관점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에 어떤 사람은 “당신 생각이 틀렸다.”고 합니다. 단지 자신의 생각과 다를 뿐인데 ‘틀렸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는 견해가 달라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이지 ‘틀렸다.’고 할 만큼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든지 요주의 인물로 낙인을 찍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관점의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관점에 물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군중심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도 이런 우려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자기 관점을 가져야 하고 잘못된 관점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본문 12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서 나타나는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 로마교회에는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 사이에 신앙생활에 대한 견해차이로 인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 사상이 새롭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초기였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영적인 자유를 선언하는 복음을 옛 율법적인 관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단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옛 율법적 습관을 따르는 ‘보수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자유로 율법에서 벗어나려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교회도 이와 같은 갈등으로 서로를 비판하며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성도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이렇게 로마교회를 갈등하게 하는 두 가지 쟁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음식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절기를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음식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정결법(레 11장)에 따라서 금지된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하여 ‘육식을 피하고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25-26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으면서 먹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거나 먹는 사람들을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절기에 관한 문제는 본문 5절의 말씀인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는 말씀처럼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던 절기들입니다. 즉 유월절(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3대 절기나 월삭, 속죄일, 금식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시대를 여신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진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들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러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로마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과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현대교회들도 동일하게 안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단만 해도 부끄럽도록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이 분열의 주 원인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권력의 문제로 말미암은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6-8절에서 마땅하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우리의 신앙을 좀먹는 비본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 신앙의 본질을 가리는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당파문제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문제, 사회적 지위와 신분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모든 제도가 전혀 다르게 바뀌거나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유대교에 속했던 사람들은 혼란이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여러 일들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하여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파벌의 문제와 빈부, 학연, 지연의 병폐가 교회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서 2:3-4절입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지금은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이 신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말없이 대변합니다. 지금 교회는 진정한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인간관계를 위하여, 건강이나 좀 더 나은 일터를 위하여, 돈이나 세상적인 성공을 위하여, 단순한 종교적인 신념까지 본질인 영원한 생명과는 관계도 없는 비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이 여러분을 가리지 못하도록 자신을 지키십시오.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신앙은 무엇입니까?
본문 6-9절을 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기록했습니다. 절기의 문제나 음식의 문제는 결코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핵심은 “주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신앙의 기준을 밝혀줍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원리는 ‘본질적인 신앙을 따라가면 부수적인 것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말씀이지만 마태복음 6:31-3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가 이루기를 구하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입니다. 이렇게 본질적인 신앙을 따라가면 “이 모든 것” 즉 ‘앞에서 설명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부수적인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말씀에서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이 이루기를 구하는 것’이 본질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0절을 봅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또 하나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가장 귀한 뜻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중심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본질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6-8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비판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따로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설령 우리가 판단하는 그들이 믿음이 약하여 모든 일에 실수가 많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그들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기억하고 영적인 올바른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올바른 관점으로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지켜서 본질적인 신앙과 흠이 없는 삶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일들을 자백할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는 오히려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