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세대 지혜로운 삶
*** 어리석은 세대 지혜로운 삶 / 마가복음 10:35=45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길게 혹은 짧게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쉽던가요? 혹은 어렵던가요? 아마도 대부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이 만만치 않다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 없이 되는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별로 어려움을 모르고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본문말씀에 등장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모든 일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자신이 하기 나름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본문 45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우리는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섬김의 길’ ‘희생의 길’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이 길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세상적인 영광의 길을 구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들이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동일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이 시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아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시기적으로 볼 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거의 마치실 무렵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우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 이제 왕이 되실 기대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욕망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급기야 선수를 친 형제가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구했습니다. 본문 37절에서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만 보아도 제자들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신다는 생각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운데,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향하여 화를 냈다는 것은 자신들도 이미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잘 못 구하고 있음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으로 눈이 멀어버린 형제는 그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이없게도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자신들이 질 수 있다고까지 장담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고 미련한 제자들을 불러놓고 주님을 따르는 진실을 가르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권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섬김의 길과 낮은 자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내가 구했던 것들이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분별하는 깨어있음이 중요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별한 자리를 요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사람에 속하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본문은 믿는 사람들, 특히 제자로 불릴 정도로 신앙심 깊은 성도들이 대상이 되어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심이 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나타날 수 있는 큰 유혹거리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따르던 열 두 제자들에게도 인간적인 욕구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틈만 나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신경전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시간이 임박함에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제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은밀한 부탁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이 일을 마태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까지 동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권력을 잡고 싶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아마도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이 발칵 들고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잘 못 알고 있다.’고 하셨지만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몸이 달아오른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고난이 어떤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는 영의 생명이 잠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영의 생명이 잠들어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육신의 일들만 보이게 되고 당연히 육신의 일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일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영적으로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과 그 추종 세력들은 자신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 12:1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이 말씀대로 지금 온 세상은 이미 마귀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왔던 대한민국,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이 민족에게 엄청난 믿음의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그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7일 국무회의를 통하여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분 즉 성평등(性平等)이라는 부분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전 국민, 특히 한국교회를 대상으로 합니다. “동성애는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마땅한 인권이다, 개인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성적쾌락을 즐겨라. 누구든지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여 차별대우하거나 혐오하지 말라.”는 요지로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교육 선전 세뇌시킬 것이며 불복종한다면 제재를 가하겠다는 대통령의 명령입니다. 동성애 성소수자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기독교 교회와 대다수 국민을 차별 혐오범죄인으로 매도하고 역차별하겠다는 사탄의 교회말살계획입니다. 이제 곧 온라인 오프라인 모드를 통하여 대대적인 홍보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지금 무슬림들이 난민이라는 빌미를 앞세워 우리나라를 무슬림화하려고 벌써부터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이비종파, 이단들, WCC, WEA, 거짓 목사, 거짓 선생들, 거짓 예언자들 등.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의 교회는 영이 잠들어 있어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권세는 이 나라를 장악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와 목사들은 이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교묘합니다.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평등(性平等)을 주장하고,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하면서 종북도 난민도 모두 평화로 위장합니다. 이런 술수는 마귀의 수법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입니다. “그런 사람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거짓되고 어리석은 세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잠깐만 육신의 욕망에 빠져도 이렇게 영의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영의 생명을 지키려면 내 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어 이 세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 생명을 지키는 지혜로운 삶은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본문 42-4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욕망에 눈이 어두운 제자들을 보면서 영적인 삶의 원리를 다시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적인 성공원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그러합니까?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세상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랑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고 싶어 하고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길은 예수님 말씀대로 이방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세상적인 방법에 길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크고 으뜸가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며, 종 된 자리에서 자기를 낮추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길을 친히 앞서 가시며 본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 당신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길을 앞서 가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길로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예수님께서 앞서 가신 이 길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의 생명을 지키는 길은 예수님을 닮는 길 뿐입니다. ㅁㅁ미국의 기독실업인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영과 재력 면에서 성공한 대표적 인물이 있습니다. ‘아더 디마스’ 장로입니다. 그는 신앙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간증 가운데서 세상적인 성공의 비결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어서 그는 주님을 위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사업주가 되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 철학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주일을 철저히 지키라. 둘째, 하루의 첫 시간은 기도로 주님께 바쳐라. 셋째, 십일조를 드려라. 넷째,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돈을 주님을 위해 쓰라. 다섯째,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시게 하라. 여섯째, 사업의 모든 문제와 필요를 주님이 해결하시도록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 사람이 사는 원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 삶의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버리고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지혜로운 생명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