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드십니까?
*** 삶이 힘드십니까? / 로마서 8:16-25
로마서 8:16-25,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즘 힘드시지요? 이렇게 물으면 한결같이 ‘이렇게 힘들 수가 있는지!’라면서 ‘사는 것이 참 힘 든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날씨도 유래 없는 불볕더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아졌습니다. 삶이 힘들어지면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염려가 많아집니다. 우리가 함께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이야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노래도 흥얼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말 수가 줄어들지요. 그러다가 한참을 지나면 ‘후유’라는 한숨소리들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뜻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이렇게 한숨소리들이 나기 시작하는 때쯤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를 강타하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의 여러 문제들이 중첩되고 가중되면서 이곳저곳에서 ‘못 살겠다.’라는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환경으로 볼 때에도 지금 한국교회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 다윗도 고난 중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시편 22:1-2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부르짖으셨던 그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삶이 힘들 때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 불평하고 서로를 탓하며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지는 않습니까? 본문말씀을 통하여 삶이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살펴봅시다.
※ 도대체 왜 삶의 어려움이 옵니까?
나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주일도 잘 지키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삶이 힘들겠습니까? 조금 불평해 보자면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이웃집 사람은 제멋대로 사는데도 잘만 살고 어려움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아니 다른 교회 다니는 어느 집사님은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신앙도 좋지 않게 보이는데 돈도 잘 벌고, 자식들도 잘 되고, 해외에 놀려도 잘 갑니다. 욥이 고난 중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욥기 21:7-11절입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세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는 낳는구나. 그들의 아이들은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솔로몬도 이런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전도서 7:15절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이런 문제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하박국 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 문제입니다. 왜 세상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지난 장마 때부터 지난 주간까지 교회에 오면서 입구에 있는 논을 살펴보셨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이 ‘벼가 잘 자라고 있구나.’정도로 생각하거나 무심결에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신 분은 장마 때에 논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장마로 물이 과하게 고이지 않도록 미리 물꼬를 터고 배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마가 끝나고 볕이 쨍쨍하여 논바닥이 다 말랐음에도 여전히 윗 물꼬를 터지 않고 계속 바닥을 마른채로 두었습니다. 제가 논바닥을 발로 밟아보니 전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벼가 다 마르겠다 싶을 때인 며칠 전에 논에 물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장마가 끝났음에도 물꼬 트는 것을 잊어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논바닥을 말린 것입니다. 이는 논에 물을 계속 풍성하게 두면 벼는 잘 자라겠지만 볏대가 약하게 됩니다. 마치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는 것처럼 여름에 환경이 좋을 때는 잘 자라기 때문에 나이테가 넓지만 겨울의 혹독함에 자라지 못하여 나이테가 촘촘한 것과 같습니다. 논에 물이 마르면 벼는 성장이 더디지만 볏대가 튼튼하게 됩니다. 볏대가 약하면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쓰러져버립니다. 태풍 때에 벼들이 모두 쓰러진 것을 보셨지요? 하지만 가끔씩 논에 물을 말려서 볏대를 튼튼하게 해두면 웬만한 바람에는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앞에서 신정론으로 하나님께 질문했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봅시다. 하박국 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이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저는 하나님의 약속인 이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의 풍파에 쉽게 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함여한 자가 되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어려움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뿌리를 든든하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삶의 힘든 시기를 지나온 사람은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 닥쳐도 쓰러지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은 마치 영적인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문말씀에서는 장래의 영광을 위한 절차라고 하십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한다면 고난을 거부해도 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음을 그 다음 구절이 증언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구절은 ‘감히 어떻게 이 땅에서의 고난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과 비교한단 말입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힘들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본문 21-24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를 소망하며 어떤 환경에서도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러면 삶이 힘들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8-20절 말씀을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일들에 굴복하며 삶을 힘들어 할 때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시편 42-43편의 레위의 후손인 고라 자손이 쓴 시편에서 고난으로 허덕일 때에 스스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네게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레위자손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주인이시며 자신들의 삶을 주관하심을 믿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멸망당하고 대적들이 자신들을 비웃으며 포로생활의 고달픔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과 시온 산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힘들 때에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교훈적인 이야기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들 넷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지혜롭게 살도록 일을 계획했습니다. 네 아들들을 불러서 “내년 이맘때까지 각자 배나무를 보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은 겨울에 보러갔습니다. 둘째는 봄에 갔고, 셋째는 여름에, 막내는 가을에 보러갔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각자 무엇을 보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맏아들은 “앙상하게 마른 나무는 죽은 것 같았어요.” 둘째는 “아니요, 온통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난 것이 분명 살아있었어요.” 셋째는 “무성한 잎사귀가 우거지고 싱그러운 냄새가 났어요.” 막내는 “무르익은 나무에는 많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렸고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느꼈어요.” 각자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저마다 계절별로 변화한 나무를 보았기 때문에 네 아들 모두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로 한 가지만 보아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법이니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진면목, 진정한 사랑과 행복, 이 모든 것을 두루 겪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겨울에 단념해버리면 곧 다가올 봄의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며, 생기 넘치는 여름과 생명력 충만한 가을 열매를 놓치게 된단다. 어떤 일이든지 일 년 중 한 계절만 겪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결정해서는 안 된다. 혹독한 계절에 찾아온 시련 때문에 그 후에 찾아 올 행복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춥고 힘든 겨울을 지날 때에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고 할지라도 겨울은 지나갈 것이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처럼 혹독한 계절에 찾아온 시련 때문에 그 후에 찾아올 행복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의 시련의 시기를 잘 견디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21:6-7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이 말처럼 인생의 힘든 길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결론의 말씀이 25절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세상은 장밋빛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서 이 지구촌은 엄청난 환난이 뒤덮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라.”(마 24:7-8) 이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이 긴장되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위를 바라보십시오. 비온 후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고난의 연단은 죄를 그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삶이 어려울 때면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자유가 더 가까이 다가왔음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이렇게 우리 교회는 준비된 사람으로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기쁨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즐거운 신부의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