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10:32-39
히브리서 10:32-39,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들어가는 말
시편 90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712년에 태어난 중국의 시인 두보(杜甫)가 자신의 시(詩)인 곡강(曲江) 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었고, 이 글이 우리나라에서는 페러디(parody) 되어 ‘인생칠십고래장(人生七十高麗葬)’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옛 시대에는 인생 60세만 되어도 오래산 것이어서 환갑(還甲)이라고 했고, 70을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喜壽), 88세를 미수(米壽), 99세를 백수(白壽)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생 칠십 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들의 평균 연령이 76세라고 하니 참 세상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마냥 좋아할 것은 아닙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해야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방랑시인인 데이비스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런 싯귀로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어부 시간은 강물.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줌의 연기뿐…” 이 내용은 ‘인생이라는 어부는 끊임없이 강물이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의 고기를 낚아보려고 했지만 낚는 것은 죽음뿐이었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인생무상으로 인생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길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6절에서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3:14절의 말씀처럼 약속을 향하여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37-39절을 봅시다.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교만’, ‘고집이 센 자’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라는 말은 ‘멸망 가운데로 뒷걸음치는 자’라는 말입니다. 즉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겁을 내고 움츠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환경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믿음에서 뒷걸음질 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환경은 무엇입니까? 본문 32-34절에서 이 말씀의 기록자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영적인 싸움의 엄청난 환란을 견디어 내었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환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환난과 불이익 등의 고난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구절로 보아서 이 편지를 읽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고난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으며,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고 ‘오랜 병에 효자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렇듯 아무리 믿음이 견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고난이 오래가면 그 믿음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뒤로 물러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의 삶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뜻을 따라가는 세속화 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절을 봅시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그리스도인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며 또한 그렇게 주장하여 교회에 해를 끼쳤습니다. 디모데후서 2:17-18절입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과 진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믿음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이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20-22을 봅시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경고합니다. 하나는 교회에서 거짓 선생들이 사람들을 음란이나 육체의 정욕 등의 세상적인 것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지키며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죄에 빠지도록 미혹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배교하는 것입니다. 배교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악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길을 알고 나서 그것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더 많이 분노하십니다. 누가복음 12:47-48절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알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세속화 되거나, 우상숭배 하게 되는 것이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선 결과는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6:4-6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 다시는 생명의 길로 돌이킬 수 없는 버림받은 자가 됩니다.
※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35-3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면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는 길 뿐입니다. 혹시 ‘가만히 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곧 뒤로 물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뒤로 물러가는 것이 되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말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커스를 보면 외줄 위에서 긴 막대로 균형을 잡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묘기를 보신 적이 있지요? 이런 묘기를 어느 모험가가 계곡 사이에 줄을 매고는 외바퀴 수레를 타고 건넜습니다. 그리고는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 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망설임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예”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수레에 타실 분 안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경하던 군중들은 모험가가 행동한 묘기를 신뢰했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믿음을 자신에게 적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군중들의 믿음은 자신의 내면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에는 행동이 따르며, 삶에서 그 믿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만일 믿노라고 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면 그는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44절입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나무’는 ‘사람’을, ‘열매’는 ‘나타나는 삶’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섭리를 따라서 정직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고 삶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가는 길 뿐인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자신도 그 말씀대로 행동하고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두고도 여리고 성과 거인족 등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환경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대로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14:27-30절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으로 슬픈 비극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놓쳤습니다. 그 척박한 광야에서 실컷 고생만 하다가 비참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생애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그 말씀대로 행동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뒤로 물러서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일에 너무 지쳐서 포기할까봐 미리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즉 ‘조만간, 아주 잠시 동안이 지나면, 오시는 이가 이를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힘겹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육신의 잠시의 낙을 위하여 포기한다고 해서 당장 육신적으로 팔자가 펴지거나 평안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좀 더 참고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던 ‘칼빈 쿨릿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으로 인내를 대신할 수 있는가?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도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용기 있는 사람도 실패하는 것을 보는데, 이도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에 “기다리는 것은 곧 믿는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내란 얻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룰 때까지 뒤로 물러서지 말고 인내하며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동하며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때에는 약속의 나라를 상속하는 은총을 확정하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