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060회 작성일 2018-12-21 00:17
***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 / 누가복음 18:1-8, 예레미야 33:2-3
 
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자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레미야 33:2-3,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들어가는 말
 
요즘 들어 답답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의 현실, 지속되는 불황, 무언가 모를 사회의 현상들이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어느 분야든지 마음을 두고 깊이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곳이면 다들 비슷한가봅니다. 예전에는 영화들이 슈퍼맨 같은 영웅이 등장해서 불가능한 일들까지도 시원하게 해결하여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영화들을 보면 영웅이 한 사람이 아니라 떼거지로 등장합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는 모습들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답답함으로 가득차기도 하고 더 큰 자극을 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로 치닫는 세상의 혼탁함이 답답하고 염려스럽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의 손길이 임하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마리아를 지날 때에 자신들을 거부하는 사마리아 마을을 불로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53-54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도록 세상이 답답했습니다. 이런 답답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장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어떤 도시에 거만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편견으로 대하는 오만불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도시의 한 과부가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그 재판장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가난하고 힘도 배경도 없는 과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내 원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한동안 과부의 소청을 무시하던 재판장은 매일 찾아와서 떠들어 대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서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과부의 소청을 들어줄 결심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간청하는 과부의 소청을 들어주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녀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겠느냐?” 이 비유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간구가 하나님의 응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간절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야기 끝에 묘한 뉘앙스를 남기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즉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마지막 세대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간절한 부르짖음을 찾기가 힘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예레미야 본문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많이 인용하는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남유다의 멸망이 가까워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찾으면 응답해주고 미래의 일까지도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 본문말씀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부르짖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부르짖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말씀을 기억하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하게 찾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2:23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 말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의 삶을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이 간절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며 우리에게 생명의 보장이 됩니다. 반대로 세상 흐르는 대로 무상심심하게 따라가면 죽음이 보장됩니다. 우리 영의 생명이 망하게 하려면 쾌락으로 방탕하거나, 진리를 철저히 배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인 아무런 관심도 갖지 말고, 그냥 육신의 욕구대로 되는대로 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영혼은 무참히 망쳐서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만일 이렇게 우리 영과 육신의 삶이 망하여 저주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생활 속에서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은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부르짖다”의 원래 의미는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들어주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강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간구하다’라는 말로도 가능한 ‘사생결단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요청은 많습니다. 예레미야 29: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본문 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22:23절에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하시며, 시편 77:1절에서는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약에서도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부르짖는 간구를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0:47-48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부르짖는다고 해서 소리만 크게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부르짖음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친히 보이셨던 것처럼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하여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마치 헤엄을 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소설가인 ‘웰츠(Herbert George Wells)’라는 분이 쓴 단편소설 중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대주교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30년을 한결같이 기도했습니다. 이 30년의 기록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한결같은 대주교의 기도하는 모습을 부러워하였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주교의 기도는 화려한 언어로 매끄러운 내용이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며,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다 녹일 만큼 간절했습니다. 심지어 그 기도를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대주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 자랑거리던 기도시간에 죽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습관대로 거룩한 복장을 하고 마음을 모아서 늘 하던 대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라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소설가 웰츠는 아마도 외식적이고 진정성이 없는 기도의 허무함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화려한 언어나 애간장을 녹이는 감각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사정을 아시며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의심’은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악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는 말씀대로 응답이 약속된 첫 번째 조건은 ‘오직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삶으로 주님께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간절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본문 6-8절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자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말할 때는 ‘행동을 수반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실천’ 즉 행동을 말할 때는 ‘믿음이 근본이 되는 순종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분명한 사실조차 거부하며 간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하더라도 앞의 예화처럼 믿음 없는 형식적인 기도들만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민족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구두 수선공이 어느 날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아침기도 시간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그들은 모두 구두가 한 켤레씩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의 구두를 저녁 늦게야 받아 가지고 거의 밤새도록 수선하는 일을 합니다.” “참 귀한 일을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새벽녘이 되어서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가 많지요. 그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 전에 구두를 준비해놓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여쭙는 것인데, 나의 아침기도 시간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요?” “그동안은 어떻게 하였나요?”
“어떤 때는 기도를 짧게 하고는 다시 일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언짢습니다. 또 어떤 때는‘주님, 죄송해요’ 하고는 그냥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뭔가 허전해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구두에서 망치를 들어 올릴 때면 이따금씩 나의 가슴이 이렇게 한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나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다. 아침기도조차 할 수 없으니…’ ”
그는 이 말을 마치고 나서 또 한숨을 지었습니다. 수선공의 말을 듣고 있던 랍비가 말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아침기도보다 그 한숨 소리를 더 값지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는 랍비의 말은 ‘삶이 곧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삶이 바쁘고 지치고 시간이 없습니까? 이야기 속의 구두수선공처럼 삶이 바쁘고 시간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영의 생명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한숨이라도 크게 내 쉬십시오. 하나님은 그 한숨 소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기도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길도, 문제가 해결 되는 길도, 구원에 이르는 길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뿐입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본문 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부르짖고 기다리십시오. 요한복음 15:7절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들의 삶에 항상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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